2024/11 21

20. 끝맺지 못한 이야기, 오블완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서울에서 나고자란 내가 전라도 광주에서 있었던 5.18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날 그 장소에 있지 않던 사람이 어떻게 피해자가 되었는지,나비효과처럼 우리는 모두 의도치않게, 예측하지 못한 일에 휘말릴 때가 있다. 마치 내가 이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오블완 챌린지를 만난 것과 같다. 오블완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티스토리가 아닌 다른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일들의 많은 부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티스토리 역시 오랫동안 내게는 잊혀진 블로그였다. 아주 많은 나의 수필과 같은 기록들이 저장되어 있는데 뽀얗게 먼지가 쌓여서 정체가 분명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나의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21일간의 오블완 챌..

my book 2024.11.27

19. 결핵에 걸리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는데 취업이 잘 되지 않았다. 키가 작고 못생겨서라고 생각했다. 물론 선생님들은 성적이 좋은 아이를 우선 추천해주기는 하지만, 회사들은 대부분 '용모단정'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용모단정은 '키 크고, 날씬하고, 예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요즘은 절대 취업공고에 쓸 수 없는 단어이지만 예전에는 구체적으로 키000센치 이상이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취업공고가 나면, 그 기업에 가고 싶은 아이들이 (담임교사의 추천을 받아서) 지원을 하고 학교 안에 지원한 인원 수에 따라서 취업담당교사가 최종 선정을 하게 된다. 이후 과정은 회사의 취업과정에 따르는데 대부분은 [필기-면접-신체검사]를 거쳐서 취업을 하게 된다. 이 중 '신체검사'는 형식적인 절차이기 때문에 면접에 합격을 하면 최..

my book 2024.11.26

18. 버림받을 공포, 유기불안

우리 집은 주소에 '산000번지'였다. '산'이라는 글자는 붙은 건 고지대라는 의미다. 그리고 무허가주택이다. 돈주고 사는 거래를 했는데 왜 무허가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빠는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장애인이 되었다. 전신마비 환자로 밥도 먹여줘야하고, 대소변도 받아내야하는 실직자, 백수가 되었다. 전업주부였고, 기술 하나 없던 엄마는 갑자기 가장이 되었다.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했고, 남편을 돌봐야했다. 우리 엄마와 아빠에게는 고만고만한 또래의 딸 넷이 있었다. 하루 아침에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아빠는 여기저기 편지를 써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날엔가 한 독지가 부부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날엔가 엄마는 회사 근처로 언니와 ..

my book 2024.11.25

17. 꿈을 잃어버리다.

- 너는 꿈이 뭐야?-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그런 질문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왜 아무도 나에게 꿈을 묻지 않았지?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기도 했다.  끝!! 그게 끝이나,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냥 선생님이나 아나운서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닥 공부를 잘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중학교를 배정 받고나면 입학 전에 반배치고사라는 것을 본다. 반 배치고사 성적으로 1등부터 순서대로 반을 배정한다고 하는데,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배치고사 순서로 했을 때 내가 우리반 44등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때 한 반에 58명 쯤이 됐나??? 내가 나름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렇게 시험을 못 봤다니!! 충격이었다..

my book 2024.11.24

16. 치마가 좋아? 바지가 좋아?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를 예뻐해 주셨다. 지금은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쉬는 시간이면 뭔가 나에게 심부름을 종종시키셨고 쪽지 시험을 본 날이면 방과후에 빨간색연필로 함께 채점을 할 사람을 몇몇 남기셨는데 그 중에는 나도 포함이 되었다. 나에게는 선생님께 신뢰를 받는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심부름을 하러 가려고하면 절대 비켜주지 않는 짝을 보면서도 화가 나지 않았다. 괴롭힘이 아니라 부러움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당연히 나의 가정형편을 잘 알고 계셨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측은지심이었거나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하루는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후원이 들어와서(더 자세한 설명을 하셨지만 지금은 긴시간이라는 것밖에는 기억이 안난다) 옷을 줄거라면서 ..

my book 2024.11.23

15. 잡지는 사치

학교에는 준비물로 많았다. 운동회를 할 때에는 1인당 오재미 2개씩 만들어오기 같은 것도 있었고, 과학시간, 미술시간, 음악시간 등등 챙겨야 할 물건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미처 살 수가 없어서 못가져간 것들도 종종 있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못 살것 같아서 아예 말도 꺼내보지 않은 것들고 있고, 어떤 것은 엄마는 늦게 들어오고 아빠한테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고 돈도 받아야 하는데 차마 말을 못해서 그냥 가기도 했던 것 같다. 한 번은 미술시간에 모자이크인지, 콜라주인지... 그런 걸 한다고 해서 준비물이 필요했다. 모자이크도 콜라주도 뭔지 잘 몰랐는데 선생님은 색종이도 괜찮고 컬러감이 있는 종이를 오려 붙여서 자기의 작품을 만드는 거라고 설명을 해 주셨다. 엄마한테 미술 준비물이 필요하다고 이야..

my book 2024.11.22

14. 버릴 휴지도 없던 시절

그 시절에는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학교 다니기가 여러모로 힘들었다. 학교에서 뭘 그리 내라고 하는게 많은지....육성회비도 내야했고, 우유 급식값, 국군장병에 보내는 쌀(+편지봉투 하나 가득과 선물들), 크리스마스씰도 구매해야 했다. 육성회비는 요즘으로 치면 등록금 같은 것인데, 지금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서 등록금을 내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국민학교도 돈을 내야 다닐 수 있었다. 얼마만에 한번씩 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돈도 제때 내지 못해서 담임선생님께 불려가기 일쑤였다. 우유 급식은 모든 아이가 꼭 해야하는 건 아니었지만, 담임선생님에 따라서 모든 사람을 먹게 하는 학급도 있었다. 선생님 입장에서야 아이들이 우유먹고 쑥쑥 잘 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돈이 없는집은 쌀 살 돈도 없..

my book 2024.11.21

13. 왜 나만...

아빠는 가끔 간식을 사 주셨다. 아주 무더운 여름 날에는 한 개에 50원씩 하는 하드를 하나씩 사 먹었고 가장 많이 먹었던 간식은 건빵이었던 것 같다.건빵 한 봉지를 사면 아빠까지 5명분으로 갯수를 세어 똑같이 나눴다. 맛있게 간식을 먹으며 동생들이 놀고 있는 동안 나는 아빠 옆에 엎드려서, 아빠가 불러주는 대로 편지를 받아 쓰거나 금전출납부를 작성했다.  편지는 여러 곳으로 보냈다. 광주에서 5.18 희생자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분들에게도 보냈던 것 같고, 아빠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동안 도움을 주셨던 분들에게도 보낸 것 같다. 정부부처 어디엔가로도 보냈던 것 같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주된 내용은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우리 가족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도움을 제공해 달라는 내..

my book 2024.11.20

12. 죄책감

기억이 뚝 끊겼다. 어느 날엔가부터 기억 속의 나는 언니와 함께 시골 외할머니댁에 살았다. 동생들과 엄마, 아빠는 없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국민학교는 1층 건물이었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급은 하나씩만 있었다. 할머니댁 뒷집에도 친구가 살았고, 그 집에서 다시 3분만 걸어가면 또 친구가 살았다. 뒷집 아이와 그 집 아이는 친척이라고 했다. 어느 학교에나 있는 흔한 구성으로 나를 괴롭히며 놀리는 같은 반 남자아이도 있었지만, 모두 다같이 잘 놀았다. 할머니댁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뒷산 언덕을 지나가야했다. 가는 길에는 딸기밭이 있었다. 짚풀을 덮어 놓은 아래에 딸기가 열렸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가끔 남의 밭에 살짝 들어가서 딸기를 두어개 따먹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논으로..

my book 2024.11.19

11. 서로 다른 기억

기억 속의 엄마는 언제나 집에 없었다. 밖이 아주 캄캄하게 변한 다음에서야 집에 오셨다. 집에 온 엄마의 모습도 기억이 없다. 엄마의 짜증나던 목소리, 지친 표정만 흐릿하게 떠오른다.  아빠가 다친 이후로 처음에 엄마는 이것저것 장사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는 건 호떡장사를 하실 때뿐이다. 아주아주 늦은 밤에야 엄마는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팔다 남거나, 만들다가 망친 호떡을 가지고 오셨다. 달고 만난 호떡이 먹고 싶어서 늦은 밤이 될 때까지도 잠을 자지 않고 엄마를 기다렸다. 나의 기다림과는 무관하게 엄마는 아마도 장사가 잘 되지 않고, 만들다가 망쳐 버리는 것도 많아서 남는게 없으니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일요일이면 마당에 아주아주 커다란 빨간색 고무다라 가득 물을 받아 놓고 빨래도 하고 목욕도..

my book 2024.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