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엄마는 언제나 집에 없었다. 밖이 아주 캄캄하게 변한 다음에서야 집에 오셨다.
집에 온 엄마의 모습도 기억이 없다. 엄마의 짜증나던 목소리, 지친 표정만 흐릿하게 떠오른다.
아빠가 다친 이후로 처음에 엄마는 이것저것 장사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는 건 호떡장사를 하실 때뿐이다. 아주아주 늦은 밤에야 엄마는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팔다 남거나, 만들다가 망친 호떡을 가지고 오셨다. 달고 만난 호떡이 먹고 싶어서 늦은 밤이 될 때까지도 잠을 자지 않고 엄마를 기다렸다. 나의 기다림과는 무관하게 엄마는 아마도 장사가 잘 되지 않고, 만들다가 망쳐 버리는 것도 많아서 남는게 없으니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일요일이면 마당에 아주아주 커다란 빨간색 고무다라 가득 물을 받아 놓고 빨래도 하고 목욕도 했다. 애가 넷이니 실내화며 옷 가지, 이불까지 빨래가 산처럼 쌓였다. 게다가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아버지의 옷가지까지.
커다란 다라에 들어가서 발로 밟아 빨래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기한 것이, 우리 자매들 모두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아버지 시중도 들었는데, 실내화 빨기는 하지 않았다. 실내화는 항상 엄마가 빨아주셨다. 나중에 중학생 쯤 되었을 때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5학년 때쯤 부터는 엄마한테 실내화 빠는 방법을 배웠고, 직접 빨아서 신어야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살던 집에서 이사를 하고부터는 석유풍로를 사용했다. 석유를 넣어서 심지가 석유를 빨아 들이면 그 심지에 성냥으로 불을 붙여서 사용하는 화구이다.
문제는 성냥에 불을 붙이는 거였다. 성냥 끝을 성냥 박스에 황이 뭍은 면에 톡하고 쳐서 황에 불이 확~하고 붙는 것이 너무 무서웠던 나는 성냥불을 켜지 못했다. 겨우 성냥에 불이 붙은 다음에는 심지에 그것을 갖다 대어, 석유풍로 속 심지에 불을 붙여야했는데 그때는 성냥에서보다 훨씬 더 큰불이 일어났다. 언제나 긴장하고 화들짝 놀라고를 반복하며 겨우 불을 붙였다. 이제 풍로 위에 솥을 올려 밥을 짓기만 하면 되었다.
스무해 정도가 지났을까, 내가 성인이 되어서 엄마의 옛날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엄마는 어릴 때부터 밥하고, 빨래하고, 동생들 옷을 만들어 입히는 등 집안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어려서부터 집안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당신이 돈을 벌러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밖에 없었던 일들은 어쩌지야 못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은 어떻게든 본인이 직접 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해서, 엄마와 우리의 기억은 너무나 다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집안 일을 다 했다. 밥도 하고, 청소도하고, 아빠 머리도 감겨야 했고, 연탄불도 갈고.
엄마는 엄마와 같은 인생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집안 일을 시키지 않았다.
이렇게야 기억이 다르니 '아이고, 힘들었겠구나.', '진짜 고맙구나.' 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건 오랜 세월 동안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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