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규칙적이고 정확한 사람이었다. 딸 네 명이 각각 요일마다 다르게 끝나는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기다렸다. 예상한 시간에 집에 도착하지 않으면 혼이 났다.
집에 가면 할 일이 많았다. 아빠가 다친 이후로는 엄마가 돈을 벌러 나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했다. 아빠의 소변통도 비워야했고, 재털이도 치워야했다. 누워 계신 자세도 바꿔 드려야 했다. 아빠는 스스로는 옆으로 돌아눕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 자세로만 계속 누워 있으면 욕창이 생겼다. 두어시간 마다 아빠의 자세를 바꿔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욕창이 생겼다. 아빠는 살이 썩는 욕창이 생겨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자세를 바꿔도 계속 여기저기 욕창이 생기고, 그 자리가 눌리지 않도록 자세를 잡아 드려야 했다. 그리고 이미 생긴 상처의 치료도 해야했다.
거즈를 떼고, 소독을 하고, 마데카솔 가루를 뿌리고 다시 거즈를 대고 테잎을 붙인다.
일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가끔씩 아빠는 간식을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지금도 생생이 기억이 나는 건 아빠가 도너츠를 만들어 주시는 장면이다. 물론 아빠는 방문 앞에 고개만 내밀고 계신다.
- 버너를 가지고 와라
- 깊이가 있는 팬을 가지고 와라
- 그거보다 깊어야 한다
- 밀가루를 얼마만큼 퍼라
- 물을 얼만큼 넣어라
- 잘 섞어서 반죽을 만들어라
등등 아빠는 모든 과정을 말로 우리에게 설명을 한다. 밀가루 가루가 하얗게 날리고 집안이 난리가 나는데, 나는 아빠가 시키는 걸하면서도 가운데가 동그랗게 비어있는 도너츠 모양을 어떻게 만들지가 너무 궁금했다. 아빠가 만족한 반죽을 뱀처럼 길게 만들어서 동그랗게 끝을 이어 붙였더니 도너츠 모양이 되었다. 신기했다. 그리고 팬에 기름을 붓고 반죽들을 하나씩 기름에 넣었다. 갈색으로 먹음직스럽게 튀겨진 도너츠가 드디어 완성이 되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맛이 있었다.
한 번은 만두를 만든 적도 있었는데 요즘처럼 만두피를 살 수 있는게 아니고 집에서 직접 만두피를 만들어야 했다. 반죽을 얇게 미는게 진짜 힘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넓적하게 만든 반죽을 다시 만두피 크기로 잘라내는 게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주방에 있는 동그란 것들을 하나씩 가져오게 했다. 국대접, 밥공기, 주전자 뚜껑, 간장종지 등등 아빠는 생각나는 동그란 물건들을 이것저것 가져오라고 했다. 그릇을 눌러 동그랗게 오려낸 반죽이 만두를 만들기에 크기가 적당한지, 반죽이 잘 잘려 나가는지 테스트를 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만 빼고는 아빠는 말도 잘하고 계산도 잘하고 아는 것도 많았고, 못하는 게 없어 보였다. 방에 누워만 있는데도 천리를 보는 사람처럼 모르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은 아빠가 내가 학교를 가고 집에 없을 때는 일어나서 걸어다닐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아빠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얼굴과 왼손 뿐. 왼손으로는 겨우 숟가락을 잡을 수 있어서, 숟가락으로 떠 먹는 반찬은 직접 드실 수 있지만 젓가락을 써야 하는 건 누군가 숟가락 위에 올려 줘야 했다. 그런데도 나의 상상 속에서 아빠는 내가 집에 없는 동안에는 모든 걸 스스로 다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아빠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아빠가 5.18 때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환자가 된 때는 겨우 마흔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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