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뚝 끊겼다.
어느 날엔가부터 기억 속의 나는 언니와 함께 시골 외할머니댁에 살았다. 동생들과 엄마, 아빠는 없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국민학교는 1층 건물이었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급은 하나씩만 있었다.
할머니댁 뒷집에도 친구가 살았고, 그 집에서 다시 3분만 걸어가면 또 친구가 살았다. 뒷집 아이와 그 집 아이는 친척이라고 했다. 어느 학교에나 있는 흔한 구성으로 나를 괴롭히며 놀리는 같은 반 남자아이도 있었지만, 모두 다같이 잘 놀았다.
할머니댁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뒷산 언덕을 지나가야했다. 가는 길에는 딸기밭이 있었다. 짚풀을 덮어 놓은 아래에 딸기가 열렸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가끔 남의 밭에 살짝 들어가서 딸기를 두어개 따먹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논으로 삐라를 주우러 다녔다. 삐라를 주워서 학교에 제출했다. 가끔씩은 조금 더 멀리 나갔다. 기차역으로 한 정거장 거리였는데 기찻길을 따라 걸으면 20여분 정도가 걸렸던 것 같고, 동네를 휘~익 돌아서 제대로 된 길을 따라 걸으면 그것보다 두배는 더 시간이 걸렸다.
학교를 마치고 논밭으로 돌아다니다가 그렇게 읍내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은 언제나 기찻길을 따라 집에 오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기찻길을 따라 오는 길 중간에는 개울길이 있었다. 듬성듬성 기찻길의 침목 사이 텅 빈 공간에는 까마득히 먼 아래로 개울물이 출렁거리며 흘렀다. 침목과 침목의 사이는 너무 멀었다. 나는 금새 그 사이로 발이 빠지로 개울물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아 무서웠다.
그 곳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은 조금의 망설임도없이 웃고 떠들며 거침없이 그 길을 뛰어 갔다. 나보다 한 살 위의 언니는 잠깐 나를 돌아보고는 역시 아이들을 따라서 달려나갔다. 나만 오도가도 못하고 안절부절 하다가는 언니마저 떠나고 나서는 그 자리에 서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결국 온 길을 되돌아와서 다시 읍내를 돌아 터덜터덜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았다.
어느 날엔가는 병원에 갔다. 아마도 방학 때 엄마가 언니와 나를 데리러 왔을 것 같다.
병실에 들어갔다. 작은 침대 위에 머리를 빡빡 민 깡마른 아저씨가 누워 있었는데 '아빠'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아빠는 아니었다. 얼굴도 달랐다. 이상하고 무서웠다.
나는 조금씩 뒷걸을질을 치다가 결국에는
- 아빠 아니야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침대 위의 아저씨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끝을 살짝 움직였던 것도 같다, 아마도.
아빠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었으니까.
그리고 며칠 동안은 아마도 그 병원에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는 엄마와 동생 둘이 같이 있었다. 낮에 동생들이 병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는 동생들이 행복해 보였고, 나는 약간의 배신감도 느꼈던 것 같다.
동생들은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어린 나이였고, 엄마는 언니와 나에 동생들까지 차마 할머니댁에 맡길 수가 없어서 병원에서 함께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신마비 환자인 아버지 옆에 보호자는 필수였고, 하루종일 병수발을 들면서 어린 두 아이를 맡길 곳도 없고 병원에는 보호자 간이침대밖에 없었을 텐데... 세 식구가 어디에서 어떻게 잠을 잤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수입도 없는데 밥을 무슨 돈으로 먹었는지, 매일 사 먹었는지, 어디 밥을 지어 먹을 곳이라도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세 식구의 삶도 녹록치 않았을 터인데.... 나도 어렸던 그때에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문득 한 번씩 아빠가 아니라고 울면서 뒷걸음질을 치던 내 모습과 그때 아빠의 슬픈 눈, 손끝의 작은 움직임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는 그게 두려움에 대한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선명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죄책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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