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산을 잘 한다. 숫자 암기도 잘하는 편이다.
참, 여기서 암기와 계산을 병합하면 안된다. 암산은 못하기 때문이다.
상업계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주산 부기 타자 자격증이 필수였는데 아이들이 제일 어려워했던 부기 자격증을 가장 먼저 취득했다.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와 같은 재무재표 서류를 보거나 맞추는 걸 쉽게 해서 가능했다.
해서 한때는 공무원이 되었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을 따라 세무공무원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노량진 공무원 학원에서 세법 선생님은 '너처럼 빨리 이해하는 애를 못봤다'며 꼭 붙을거라고 하셨지만 나는 진짜진짜 재미가 없었다. 결국 이러저러한 핑계들로 포기하고 그만뒀다.
첫 직장에서는 급여관련 업무를 했는데 숫자의 오류를 정말 잘 찾아냈다. 직관적으로 뭔가 합계가 다른걸 알아챘고 그걸 맞춰보면 어김없이 프로그램의 오류나 산출식을 잘뭇 넣었거나 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나는 숫자와 관련된 일들이 싫다는 것이다. 모임을 가도 총무를 맡기고들 싶어하며 내가 잘 할 것 같다고 하는데 정확히야 하겠지만 싫다. 싫다. 너무 싫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매일 가계부를 쓰셨다. 정확히는 가계부가 아니라 금전출납부였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는 아버지가 부르면 장부에 그것을 받아쓰는 건 내 역할이었다. 빈 공책에 날짜 쓰는 칸, 내역 쓰는 칸, 금액 쓰는 칸을 나눠서 세로줄을 긋는 것 부터가 시작이다. 들어가는 내용에 맞춰 줄 간격도 중요했다. 숫자를 쓸 때에는 자릿수를 맞추는게 중요했다. 일마감, 월마감을 하며 수입과 지출 그리고 잔액을 맞춰야했다. 화이트라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 행여라도 틀리면 아버지의 혀를 쯧쯧차는 소리를 들으며 빨간볼펜으로 두 줄을 긋고 수정해야 했다.
그러고 보면 내 회계에 대한 기본지식은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다. 매사 정확한 아버지에게서 배운 회계 감각이 나에게 숫자오류를 발견하는 직관과 재무재표를 이해하는 능력을 준것 같다.
하지만 매일 저녁 다른 자매들은 놀고 있는 시간에 아버지 옆에 붙잡혀 긴장한 채 계산을 맞춰야했다. 줄 하나를 그을 때조차 '조금 더 왼쪽, 아니 너무 많이 왔잖아, 으이구, 쯧쯧' 이런 소리를 들으며 눈치를 봐야했고 빨간줄을 그어야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는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전신마비인 아버지는 머리를 쥐어박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과 눈흘김뿐이었지만 아직도 뭔가가 잘못 되었을 때 아버지의 혀를 쓰는 소리와 눈흘김은 생생이 떠오른다.
나는 오랫동안 저녁마다 아버지와 금전출납부를 썼다는 걸 잊고 있다가 몇 년전에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다시 떠올리게 됐다. 선택적 기억상실을 할 만큼 나에게는 어려웠던 일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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