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어귀에는 가끔씩 낯선 아저씨가 있었다. 우리 집 앞에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집들이 있었고 사각형 한쪽 모퉁이가에 우리 집이 있었다. 대문이 있는 같은 골목의 길 끄트머리에 가끔씩 어떤 아저씨가 서 있었다.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누구네 집을 찾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어디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동네 골목길을 뛰어다니면서 친구들과 놀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구멍가게를 갈 때면 골목 끝에서 까만색 머리가 살짝 보였거나 베이지색 버버리 자락 같은 것이 보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막상 골목 끄트머리에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이었던가,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왔는데 바로 그 낯선 아저씨가 집 안에 있었다. 나는 흠칫 놀랐다. 마루에 올라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아빠가 얼른 들어와 인사를 하라고 했다.
- 들어와서 인사해야지. 이00 아저씨잖아.
연한 베이지색 버버리를 입고 살짝 곱슬한 헤어스타일을 한 아저씨는 키도 크고 멋있어 보였다. 아저씨의 이름을 듣는 순간 바로 경계심이 풀렸다. 나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아빠가 불러주는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한 우리의 사정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는 썼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아저씨는 아빠와 마찬가지로 광주에서 다친 장애인이었고, 한쪽 다리를 절었다. 아저씨는 아저씨는 평생 처음 보는 바나나를 한 송이나 사가지고 오셨다. 바나나는 노랗게 탐스러웠고, 정말 맛있어 보였다. 바나나색만큼이나 그 아저씨도 친절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우리 집이 누군가의 감시대상이라는 걸 잊고 살았다. 골목 어귀의 그 사람이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이00 아저씨가 우리집 마루에 서 있는 걸 봤을 때 내가 흠칫 놀랐던 건 어린 아이였고, 정확히는 몰랐어도 직감적으로 그런 상황을 눈치 챘던 것일 터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가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후로는, 우리 집을 감시했던 사람들과 그 아저씨가 동일인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무장해제가 되어 버려서 감시당했다는 사실조차 까먹어 버린 것이다.
엄마는 5.18 즈음이 되면 엄마 직장에도 누군가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행여 엄마랑 아빠가 광주에 내려가는지 확인을 하려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엄마에게든, 아빠에게든 더 많이 접근을 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종종 지나치게 사람들을 경계하고 곁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순간 너무나도 무방비가 되어버린다. 사실 티스토리의 제목이 <약간의 거리>인 이유도 그것이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살짝 가까와졌다가 조금 멀어지기도 하는 것. 그런 인간관계의 거리조절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고급기술이라서 어렵기만 하다. 한 번 가까와진 사람과 멀어지기 어렵고, 그래서 가까와져도 된다는 판단이 들기 전까지는 아주 먼 거리였으면 좋겠다.
낯선 사람을 천천히 알아가는 기술을 이제는 좀 쓸 수 있게 되면 좋겠다. 반걸음 다가서기, 한걸을 다가갔다가도 다시 반걸음 물러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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