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오래전 드라마 중에 <화유기>라는 작품이 있다. 이승기, 차승원, 이홍기, 오연서, 이세영 등 유명한 배우와 아이돌이 나왔던 드라마다. 손오공을 비롯한 요괴(?)들이 등장하고, 그 중 평범한 인간이 한 명 등장하는데, 그녀는 귀신을 본다. 어렸을 때 어찌저찌 벌을 받고 있던 손오공을 풀어 준 벌로 귀신을 보게 되었다. 성인이 된 그녀는 처음 손오공을 만났을 때 들고 있던 노란 장우산을 아직도 들고 다닌다. 무서운 귀신과 마주쳤을 때 우산을 펼쳐 시야를 가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산을 휘둘러서 귀신과 대적하기도 한다. 물론 우산으로는 귀신을 퇴치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노란 우산은 그녀의 하나뿐인 무기이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귀신을 혼자만 보는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건 그 우산 뿐이다.
어렸을 때 우리집에는 사람 수만큼의 우산이 없었다. 비가오는 아침 등교를 늦게 하면 우산이 없거나 찢어진 우산을 쓰고 가야했다. 하교 시간 갑자기 쏟아진 비에 행여라도 다른 친구들처럼 엄마가 우산을 가지고 마중을 오는 일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머뭇거릴 이유도 주위를 둘러볼 까닭도 없기에 그냥 비를 맞고 집에 왔다.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가계셨고, 아버지는 하반신 마비 환자로 집에 누워계셨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마중을 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니면서부터는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지체없이 우산을 샀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준비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면 안되었기 때문에 아침이면 뉴스 채널을 돌려가며 날씨예보를 봤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가방 안에는 언제나 작은 우산이 하나 들어 있었다. 간혹 날이 맑은 날에도 예쁜 우산을 만나면 샀다.
초여름이었다. 아주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는데 점심시간 회사 근처에 우연히 들어간 팬시점에 하얀색 바탕에 검은 기하학적인 무늬가 있는 장우산이 있었다. 나는 우산을 꺼내 펼쳐 보았다. 예뻤다. 무늬가 특이해서 어디에서고 이런 모양의 우산은 구할수 없을 것 같았다. 그 팬시점에는 딱 두 개의 장우산이 있었는데 나머지 하는 엷은 옥색에 아무런 무늬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우산은 하나 뿐이 정말 특별한 거였다. 그런데 우산을 사기에는 너무 맑은 날씨였다. 당분간 비소식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 이런 날 우산을 들고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겠지? 더구나 이렇게 긴 우산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나는 그냥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 내내 업무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우산이 팔리면 어쩌지!', '설마, 맑은 날이니까 아무도 안사가겠지.', '그치만 비가 오는 날 사러가면 틀림없이 벌써 팔려 버렸을 거야.' 하며 고민을 계속 했다. 결국 집에 가는 길 그 우산을 사서 들고 갔다.
누군가 우산을 씌워 준다는 건 최고의 배려이고 사랑이 되었다. 내 우산을 들고 나가서는 잃어버리고 오는 언니가 정말 싫었다. 엄마는 집에 온 손님에게 종종 내 우산을 들려 보냈다. 나는 귀신같이 사라진 우산을 알아채고는 화를 냈는데 엄마는 우산도 많으면서 하나쯤 누구 준게 뭐가 대수냐며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 그렇게 귀중하면 네 방에서 갖고 자던지!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내 돈 내고 내가 산 내 우산인데, 마음대로 남에게 줘 버리고 도리어 왜 화를 내는지, 이게 무슨 적반하장의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의 진심인지 홧김에 뱉은 말인지 알 수 없는 의견대로 나는 내 우산을 모두 방에 들여놨다. 그때 세어 본 우산은 13개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평소 응급물품처럼 늘 들어있는 우산 외에 오늘의 비 소식에 대비한 우산을 하나 더 챙겼다. 그렇게 직장인이 되어서도 나는 가방이 무거운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우산은 엄마의 대신이었다. 우산은 비바람과 같은 고난의 상황에서 나를 보호해주는 상징적인 물건, 내 유일한 보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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