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오랜만에 방 정리를 했다. 가구 배치를 바꾸느라 책장에서 책을 꺼내고 서랍을 비우고 방안에 짐을 산처럼 쌓아뒀는데 사진 한장이 떨어졌다.
여자의 증명사진이었다.
이력서에 붙일 거라면서 예쁘게 나와야 한다고 수선을 떨며 신촌 어디메에 있는 사진관을 둘이 함께 찾아갔었다. 남자도 같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었다.
카메라 너머 저편에 여자가 비스듬히 앉아 있다.
-어때? 이상해? 얼굴이 좀 갸름해 보여?
대답도 하지 않는 남자에게 여자는 연신 질문을 던졌다.
남자는 이런 공간에 여자와 들어와 있는 게 어색하기만 했다. 그럴거면 굳이 이 사진관으로 자기를 데려온 이유가 뭐냐고, 사진관이 남녀가 함께 들어오면 안되는 공간이냐고 따져묻는 여자에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왜 저렇게 삐딱하게 앉아서 사진을 찍는 걸까? 물론 여자의 저 자세는 사진사 아저씨가 잡아준 거다. 그래도 이력서에 붙이는 사진인데 저렇게 허리를 힘들게 배배꼬아 앉아서 찍어야 하는 걸까? 남자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자는 자꾸만 묻는다.
-표정이 어색하지? 앞머리를 내릴까?
사진관을 나서면서야 남자는 겨우 왜 옆으로 앉아서 찍느냐고 했다가 그날 종일 지청구를 들어야했다.
다시 사진을 찾으러 가서 여자는 대략 만족한 듯 했고, 그때 사진한장이 남자에게 건네졌다. 남자가 가지고 있는 딱 한 장의 여자 사진.
우리.. 같이 찍은 사진은 없지만 같이 사진을 찍으러 간 적은 있었구나!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남자는 쓰지 않는 지갑의 비닐 주머니에 슬그머니 여자의 얼굴을 꽂아둔다.
사진은 그냥 사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눈을 깜빡이지도, 숨을 쉬지도 않는 걸.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를 백번은 더 반복해도 절대로 걸리지 않는, 그냥 사진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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