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날씨

기억력

약간의 거리 2007. 2. 2. 10:41

동창녀석들과 술을 마시고 헤어진 늦은 밤. 모처럼 겨울답게 날씨가 매섭다. 남자는 어깨를 웅크리고 옷깃을 여미며 종종 걸음을 걷는다.

 

- 가디건이라도 입지 그랬어. 요즘 예쁜 색깔로 많이 나와서 사무실에서도 단정해 보이고 따뜻하고 좋은데... 내가 사 주면 좋겠지만.

 

남자가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두어 번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 날은 막연히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남자는 좀더 멋져 보이고 싶었는데 그날 갑자기 날씨가 매섭게 추워졌다. 가지고 있는 코트는 달랑 하나 뿐인데, 그나마 오래 되어서 옷감도 얇아지고 별로 따뜻하지가 않다. 그래도 정장을 입으려면 어쩔 수가 없다.

첫 직장을 준비하던 때에 그녀가 비싸게 사준 넥타이를 골라 매고 나갔다. 그녀는 알아보지 못했다. 단지,

 

- 안에 가디건이라도 입지 그랬어. 내가 사주고 싶지만... 이제는 안 되겠지?

하고 말했다.

 

그때는 나름 멋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면서 저도 모르게 "아~ 추워" 하는 말이 신음처럼 나오는 밤. 남자는 문득 자신이 참 초라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벌써 2년이 지났다.

그 동안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거나 궁금하다거나 하는 생각 같은 걸 해 본 적도 없었다. 물론 가끔씩 생각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런데 매서운 바람이 옷 사이로 파고드는 밤, 느닷없이 너무나 또렷하게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 가디건이라도 입지 그랬어. 내가 사주고 싶지만... 이제는 안 되겠지?

 

전화를 건다. 이 번호가 맞을까, 두려워하며 신호음을 듣는다.

"여보세요?"

저음의 남자 음성이다. 그냥 끊어야하는데 말이 먼저 나가버렸다.

"이미순씨 핸드폰 아닌가요?"

"맞습니다. 누구시죠?"

"이미순씨 핸드폰 아닌가요? 지금 통화할 수 없나요?"

"누구시죠?"

이왕 이렇게 된거 오늘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야겠다는 오기 같은게 생겨 났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망설이는 사이 저 쪽에서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가 참 친철하고 따뜻했다.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결혼을 했는지도 모른다. 후회가 밀려왔다. 머리보다 기억력이 좋은 손가락을 잠시 원망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남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후회가 없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이상한 만족감 같은 것이 솟아났다.

남자로 인해 두 사람이 작은 말다툼 같은 걸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걸로 잠시 나를 기억하게 되겠지! 그 남자가 나를 조금은 질투하겠지.'

물론 그건 아주 짧은 다툼일거고 그 남자는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일거다. 그렇지만 그냥 잠시 동안만 기분이 나쁜 것일 뿐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 이상은 있어서도 안 되고 바라는 바도 아니니까.

 

남자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내려다본다.

'짜식~ 그걸 어떻게 여지껏 기억하고 있었냐!' 하는 듯한 눈빛으로. 일단 핸드폰에 저장한 번호는 외우는 법이 없는 남자다. 늘 검색버튼으로 찾아내서야 전화를 할 수 있던. 단축번호만이라도 외우라는 친구들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는데, 유독 그녀에게 전화를 걸 때만은 외워둔 11자리 숫자를 또박또박 눌렀었다. 아직도 손가락은 그 기억을 잊지 않은 것이다.

 

후회보다는 기쁨이, 서글픔보다는 설렘이 조금 더 큰 밤이었지만, 이제 술을 마시면 전화기는 꺼두어야겠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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