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황당한 그녀

약간의 거리 2001. 9. 12. 00:04
담당 피디를 만났다.
늘 황당하다고 생각했던 여자.
우리같은 프리랜서들을 엄청 무시하면서 늘 골탕먹이는 여자.

어떤 컨셉으로 프로그램을 만들 것인지 대충이라도 구상을 해야했지만
그 여자의 황당한 상상이 나에겐 예측불허라고 생각해서 나는 백지상태로 그녀를 만났다.

역시나 그랬다.
너무나 이상적인 기획.
그리고 그 이상적인 기획을 발로 뛰며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
막막하다고 해야 하나? 허허로운 웃음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일이 아니었을 때
내 주변의 동료들을 그렇게 괴롭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때와 막상 내 일이 되어 그녀를 바라볼 때의 느낌이 다르다.
그녀는 나를 황당하게 만들거나 골탕먹이기 위해 그런 구상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게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고,
나는 웬지 짧은 시간의 경력으로 이미 타성에 젖어버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도 현실성 있다고 생각되는,
지금 당장 나가서도 무리없이 해 낼 수 있는,
그런 기획만을 해 왔었나 보다, 나는.

그래서 그냥 한번 눈 딱 감고 그녀 뜻대로 해 보기로 했다.

힘들 거다.
안 봐도 눈에 뻔하다.
어쩜 그녀가 말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조차 못 만들지도 모른다.
부딪치고 그리고 나서 깨져보자. 되는지 안 되는지......

설령 그 일이 가능하다해도 매일매일 지옥같이 괴로울 것 같은데
그런 마음 한켠에 나도 모르게 그 계획대로 6개월이 이끌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녀처럼 황당해져 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