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시골기차

약간의 거리 2004. 4. 22. 00:17

수원에 다녀오는 지하철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술취한 할아버지, 혀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한다.

 

-거기 대학생들. 너네들 노무현 좋아하지?

  노무현이나 정동영이나 정치할 인물이 못돼. 알어?

 

일순 지하철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약간의 찌푸림 스친다.

 

쪼르르~ 예닐곱명 앉아있던 여대생들은 긴장 + 귀찮은 얼굴

 

할아버지의 일장연설은 계속된다.

 

-정동영이가 뭐라고 했는지 알어?  노무현도 지가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했으면 그만둬야지. 김근태 알어? ......

 

그런데

어느순간 지하철은 비둘기호 기차가 되어 버렸다.

 

시작은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아저씨 두분

손을 번쩍들면서 할아버지를 향해

-수고하십시오.

하는 거다.

어리둥절해 하던 할아버지는 곧 인사를 받고 사람들은 일제히 웃음을 떠뜨린다.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일장연설은 퍼포먼스가 된다.

 

- 김근태 가족은 어쩌구... 노무현이 어쩌구... 반공교육이 어쩌구...

  학생들은 잘 몰라. 윤식이는 다 알지. 윤식이가 누구냐면... 바로 나야~

 

다시 사람들이 까르르~~~~~ 웃는다.

쑥쓰러워하는, 애써 웃음을 참고 감추려는 킥킥 됨이 아니라 MT가는 기차에서 재밌는 이야기라도 듣고 있는 양

 

그때

내내 듣고 있는 여대생 중 한 사람이 소리를 냈다.

-할아버지, 여기는 공공장소에요.

-공공장소지. 내가 그걸 모를까봐.

-그러면 조용히 해 주세요. 그리고 저쪽으로 가서 앉아 가세요.

경로석을 가리킨다.

 

-내 말을 이해 못하겠어? 내가 올해 예순이야. 그렇게 보여?

-저희한테 그런말씀 하지 마시라구요.

-내말을 이해 못하겠냐니까?

-그런 말씀은 국회의원들한테 하세요. 아니면 직접 정치를 하시던가.

 

같이 앉아 있던 친구들도 놀란 모양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신다.

그래두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잠시후 다시 나타난 할아버지,

 

-난 남녀평등주의자야. 요즘은 여성 상위시대잖아. 여자는 세밀해서 잘해줘야돼. 윤식이도 세밀한데, 내가 윤식이거든. 나보다 더 세밀해.

 난 술을 먹어도 세밀해.

 

푸하하하 ^^

다시 한번 웃지 않을 수 없는 장면.

 

 

사실 수원을 오가는 지하철은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

늘 사람은 많고, 어르신들도 많고,

밀치고 부딪히고,

예의없고,

소란스럽고,

그래서 늘 녹초가 되고, 기분도 언짢게 내렸었는데

오늘은 마치

옛날에 할머니댁에 가던 때에 타던

비둘기호 열차를 탄 기분이었다.

 

윤식이 할아버지 덕분에 ...

 

 

 

 

'┎thou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  (0) 2004.04.27
다즐링  (0) 2004.04.27
유효기간  (0) 2004.04.21
착찹한 마음에 주절거림  (0) 2004.04.20
운수 좋은 날  (0) 2004.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