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괜시리 심통이 나는날

약간의 거리 2000. 12. 8. 15:47
'어디에 가서 누구를 취재하지?'

매주 월요일부터 취재가 끝나는 날까지 하는 고민이에요.
화요일까지 아무런 결정이 나지 않으면 그날 저녁부터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해서
수요일이 되면 극에 달하죠.
이번주가 그랬어요.
부장님한테는 "저 내일 아침에 취재하고 늦게 올께요." 하고 말해 두었는데.....
저녁 내내 힘없이 뒹굴거리고,
목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긴 했는데....

꼭 퇴출당한 사람처럼 출근 준비 다 하고 앉아서 갈 곳이 없더라구요.
9시가 되기만을 기다려 이곳 저곳 전화를 했죠.
그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인터뷰를 막 시작하려는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디야?"
"응. 종로"
"종로 어디?"
"왜?"
"왜냐니? 취재 잘 되는지 걱정해서 전화한 사람한테 왜가 뭐야?"
뚝!

20분, 길어야 40분이면 끝나는 인터뷰를 12시가 넘어서야 우여곡절 끝에 마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마음이 몹시도 불안해 지기 시작했지요.
아침까지 가졌던 그런 불안함과는 다른,
불길한 생각에 조금 더 가까운 그런 불안.
약간은 불쾌하기도 한 그런 불안.
오전에 받았던 전화 생각도 나고.

방송국에 들어와서도
"언니, 부장님 낮에 술마시고 얼굴 벌개갖고 방송 들어갔어."
하는 옆자리 리포터의 얘기에 가슴이 철렁하며, 내 불안함이 이런 거였나?! 하는 생각

"안나씨! 안나씨 없는 동안 저 인간이 바람폈어."하고 말해주는 앞자리 오PD.

바람?
우리가 바람피고 안피고 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거 잘 알면서,
사람들이 그냥 농담하는 거라는 것도 알면서,
그러면서 화나고 질투나는 내 마음은 또 뭔가?

"포도주 반잔 먹었는데 핑 도네." 하는 소리에 괜히 삐죽거리고,

나한테 화내는 사람,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
그와 대낮부터 포도주를 같이 마실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과는 싫어하는 술도 한 잔쯤 마시고 싶어지는 그.

그리고 그런 그를, 바람같은 사람인 그를, 너무나 잘 알면서 그 바람에 이렇게 몹시도 흔들리는 나.

그의 이런 모습이 멀리에서도 예감으로 느껴지는 바로 나.

불안한 예감을 안고 돌아오는 길 내내
'잊자. 덮어두자. 그는 바람 같은 사람인 걸. 나만 상처 받을 뿐일 걸........' 하며 얼마나 마음을 다스렸던가?!

그런데도 사람들의 몇마디 말에 이렇게 정신없이 휘둘리며 슬퍼하는 나.


내 작은 마음하나 다스리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든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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