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동생과 이야기를 하다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가족에게 알릴 것인가, 알리지 않을 것인가를 두고 언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알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동생은 너무나 어떻게 그런 걸 알리지 않을 수가 있냐고 흥분했다. 사실 동생은 거의 모든 이야기를 거르지 않고 다 하는 스타일이다.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를 하는 게 자기는 모르지만, 이 사람이 들으면 불편한 이야기일 줄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걸 전달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내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반대로 동생은 그런 나를 답답해했다.
대해서 알리지 않겠다는 나의 논리는 그런 것이다. 어차피 병은 걸린 거고, 그걸 주변에서 다 알게 된들 다 함께 우울하기만 할 뿐, 어떤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도 나름대로 정리할 것이 있는데 해결방법도 없는 상황에 서로의 슬픔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그때 동생은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가족이잖아. 나중에 얼마나 당황하겠어.' 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영화 <프랑스 여자>를 보면, 다른 사람에게 잘 다가서고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어봐주고 함께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는 영은과 영은과는 달리 자기의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 미라가 나온다. 이러한 차이는 둘을 가깝게도 하고 갈등하게도 한다. 프랑스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귀국한 미라를 위해 영은은 매일 시간을 낸다. 어느 날 저녁에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미라의 속마음을 묻는 영은의 질문에 불편해진 미라가 화를 낸다. 너는 상대에 대해서 뭐든 다 알고 싶어 한다고. 영은은 '친구잖아.'라고 대답한다.
'가족이잖아, 친구잖아.'라는 말로 모든 이유를 대신하는 이 사람들은 어쩌면 무논리에 참견쟁이들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말이 아닌 행동과 분위기로는 기대고 의지해 놓고서 막상 말로 그것을 표현해 보라고 할 때 사람은 누구나 혼자라며 버럭 하는 상대는 또 얼마나 이기적인가.
힘든 일을 겪고 몇 년 만에 한국에 온 미라는 외로웠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그녀를 찾아와 일상에 동행해 주고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주는 친구들은 그녀를 혼자 두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로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녀는 결코 20여 년 간 삶의 터전이었던 프랑스라는 곳에서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에 한국에 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말했든, 하지 않았든.
그럼 마음을 터놓아야지만 위로받을 수 있는 건가. 누군가는 내 맘을 알아주어야 위로받았다고 느끼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위로받았다고 느낀 후에야 맘을 터놓기도 한다. '사실은 그때 말이야, 나 엄청 힘든 일이 있었거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가 같이 있어줘서 고마웠어.' 이런 고백을 뒤늦게 하기도 한다.
결국엔 서로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오랫동안 가까웠던 영은과 미라는 서로의 다름을 안다. 그래서 편하기도 하고,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하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느끼고,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아서 영혼의 단짝 같다. 나와 너무 달라서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나랑 너무 비슷해서 짜증이 난다. 독립된 존재에서 조금 더 다가서고 싶은 때 마찰이 일어나고 그때 잠깐 불꽃이 일어난다. 그 불꽃이 어떤 느낌일지는 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가 정말 혼자가 된 것 같은 순간에도 우리는 혼자일 수 없고, 혼자 있고 싶지만 위로가 필요하다.
지금의 나는, 만약에 죽을병이 걸렸다는 진단을 받게 되면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게 적어도 남아 있을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죽는 사람만큼이나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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