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때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사실 누구나 자신이 인생에서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살지 않나?
그렇지만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엔 살아도 살아도 시련만 있지, 결국엔 조연의 조연쯤이나 될까말까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나에게도 역시나 그걸 알게 된 순간이 있었다.
해서 드라마 속 여인공들을 분석해 봤는데
1. 일단 가난하다. 그거야 뭐... 자격이 되기 충분하다. 그래서 여지껏 당연히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2. 베프가 있다. 완전 껌딱지처럼 붙어다니며 뭘 해도 믿어주는 오래된 진짜 친구.... 이건 없다.
3. 악역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
4. 실장님 내지는 재벌이랑 자주 마주친다.
5. 구멍이 많다.
잠깐 몇 가지만 생각해봐도 나랑은 안 맞는 것 투성이인데 그 중에서 내가 꽂힌 건 마지막 5번 '실수'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뭘해도 잘 해내는 것 같지만 어딘가 실수가 있어서 그럴 때마다 실장님 내지는 재벌2세, 그리고 그와 경쟁하는 또다른 실력자가 그걸 메꿔준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나도 실수가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였다.
첫 직장에 다닐 때 팀이 바뀌면서 완전 새로운 일을 하게 된 적이 있었다.
인수인계를 받은 대로 업무 처리를 하고 상급 기관에 서류를 제출하러 갔는데 지하철을 타고 30분은 가야 하는 거리를 갔더니 너무 어이없는 부분이 누락되어 있었다. 돌아와서 서류를 보완하고 다시 또 30분을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역시나 또다른 부분이 잘 못되어 있었다. 그렇게 세번을 다녀와서야 일이 마무리 되자 '뭐, 이런 어이없는 실수로 두 번이나 서류가 반려되어야 하나', 하는 마음에 전임자에 대한 원망과 화남,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까지 복합되어서 말 그대로 자리에 털석 주저 앉아 있었다.
담당 과장님이 그런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네 잘 못 아닌 거 안다.' 하시는데, 나는 정말이지 엄청난 오점을 나에게 남긴 것 같은 낭패감을 씻을 수가 없었다.
그랬던 내가 여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실수', 그러니까 '구멍'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 어떻게 하면 구멍이 생기지? 나도 구멍이 있는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그 '구멍'이라는 것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나에게 찾아왔다. 그건 내가 본래의 기질을 발휘하면서부터 발현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수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는 게 쉽지 않았다. 실수가 있는 순간에는 그게 여주인공의 핵심 특징이라는 것 따위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럴 수도 있지.'하는 나의 모습과 '그럴 수도 있지' 조차도 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꼼꼼히 계획을 세우는 일도 하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 "너 그런 거 잘하잖아. 네가 맡아줘" 라고 말해도 "나 그거 하기 싫은데." 하고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내가 잘하는 것은 맞지만, 그런 일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덜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불편해서 짜증이 잔뜩 올라와 있는, 그런 사람이 더 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느슨한 사람이었고, 그러다보니 구멍도 많지만, 그걸 발견하면 '앗, 그랬나요. 수정할께요.' 하면서 또 그걸 쉽게 수용하고 수정하는 사람이었다.
얼마전에는 결재를 하던 책임자가 "너 진짜 내가 잘하는 건 아는데 항상 5% 부족하다"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쵸? 소장님. 저 진짜 은근 구멍이 많아요. 제가 완벽한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너무 좋아요." 하고 말해 버렸다.
내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독오른 사람으로 살아갈 때, 나는 당연히 드라속의 여주인공이 아니었고, 내 인생에서도 주인공은 아니었다.
이제 나는 구멍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아니, 원래 구멍이 많았던 나의 본 모습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여전히 실장님이나 재벌2세가 없고, 나는 역시나 여전히 드라마속의 여 주인공은 아니다.
다만, 내 인생의 주인공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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