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카드를 분실해서 경위서를 작성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모처럼만에 너무나 여유있는 하루였다. 설렁설렁 일차 검토를 마친 보고서들을 보완하고 오후에 30분 짜리 짧은 해석상담을 하기만 하면 일과가 끝나는 날.
톡을 받은 것은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복귀를 할 때였다. 오랜만에 동료들과 함께 밖에 나와 먹는 점심이었다. 왠지 들뜬 사람들이 오늘따라 고기를 구워 먹는다고 해서 점시부터 배부르게 삼겹살을 먹었다. 국제교류로 외부에 나가 있는, 나에게는 한번도 뭘 도와달라거나 하지 않는 사람이 물건을 급히 구매해서 포장까지 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톡으로 알려주는 목록들은 이해하기에 부족한 것들이 많았다. 몇번의 질문과 답변, 사진들이 오가고 감사의 인사를 그때마다 들으며 일차 구매를 완료했다.
장소를 옮겨 다음 물건을 구매하러갔다. 이제 상담시간이 40분밖에 남지않아 마음이 급해져 오기 시작했다. 이야기했던 전통엽서는 커녕 점원이 알려준 구간을 아무리 뒤져도 엽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왔다갔다를 반복하다가 일단 다른 물건들을 주워 담으며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한 쇼핑백 정보를 기다리는데 오지를 않는다. 진열되어 있는 것 중 하나를 내가 먼저 찍어서 보내며 생각을 물었다. 답이 오지 않는다. 그때 매장내 방송에서 전통물품 코너에서 외국에서 온 친구들의 선물을 골라보라는 소리가 나온다.
전통이라는 소리에 꽂혀 한층을 내려갔다. 방송이 무색하게 그 코너는 작은 매대의 한쪽편만 겨우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성의 없게 느껴지는 엽서를 발견해 장바구니에 담았다.
아직도 쇼핑백에는 답이 없다. 상담시간은 10분 남았다. 지금 가도 늦은 시간이다. 원래 센터에 있던 것과 사진 찍어 보낸 것의 중간쯤하는 크기로 10개를 챙겨 계산을 한다. 안내데스크에 전화해 10분 정도 늦을것 같으니 내담자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그것과 조금 더 큰 사이즈로 부탁한다는 답을 들은 것 센터 앞 횡단보도에 도착할 무렵이다. 차라리 사진 보낸 것으로 들고 올 것을 후회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라 상담을 마친 후 다시 움직이기로 하였다.
물건을 사러 갈때면 크고 깊은 주머니가 두 개 있는 천 가방을 이용한다. 그리고 그 주머니에 법인카드와 영수증을 넣는다. 그래야 다른 물건들과 섞이는 일이 없다.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살짝 꺼내 올리며 교환하는데 카드가 필요한지 묻는데 답이 없다. 다시 넣지도 내밀지도 못하고 쭈뼛거리며 서 있다가교환해 온 쇼핑백에 묻은 이물질을 발견했다.
- 앗, 여기 뭐가 묻어서... 어쩌지
점원이 다른 물건으로 바꿔오겠냐고해서 그러겠다하고 다녀왔다. 교환한 물건과 영수증을 받아 센터로 복귀. 날이 너무 더워서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하나 사 마셨다.
자~ 이제 카드부터 반납하고.... 하며 가방을 뒤지는데 카드가 없다.
- 어? 나 카드가 없어. 어쩌지.
아직은 심각하지 않았는데 물건을 다 꺼내고 가방을 뒤집어도 카드가 없다.
'카드가 언제부터 없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내밀지 말지 꺼냈던 후로는.... 쇼핑백을 교환하러 가며 그것을 두고 간 것인지 들고가다가 어딘가에 흘려버린 것인지. 일단 매장에 전화를 했는데 보관하고 있는 카드는 없다고 한다. 지금 너무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이상하게 마음도 표정도 심각해지지가 않는다. 연극이 필요한 상황이다. 애써 당황하고 염려하는 척을 하며 다시 다녀오겠다고 길을 나선다.
무려 39도가 넘는 날씨에 벌써 네번째 이 길을 나가고 있다. 아~ 정말 넘나 피곤한 것.
온 길을 되짚어 가서 매장 직원을 다시 만나고, 쇼핑백 사이사이를 다 훑어 봤지만 카드는 나오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국제교류로 외부에 나가있는 부장님께 톡으로 보고를 했는데 확인을 안하신다.
일단 은행에 분실신고를 하고, 추가 사용액이 없는 것까지는 확인을 했다. 회계팀에 보고를 해야 하는데 아직도 답이 없는 부장님. 물건 구매를 부탁했던 선생님께 상황 설명을 남겼더니 바로 답이 온다. 구두로 보고가 된 모양이다.
회계 팀에 전화를 했더니 '아..'하는 신경질적인 짧은 한숨 외에는 말이 없다.
- 죄송해요... 날도 더운데... 재발급 하려면 많이 복잡하고, 힘들죠?
- 재발급 안해줄 건데요.
헉!
정말 뜨악하는 답에 뭐라 할 말이 없다.
- 왜요? 그럼 앞으로 사업을 어떻게 해요?
그제서야 그렇게 쉽게 내뱉을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담당 부장님께 보고하고 다시 알려주겠단.
내 원 참. 어이가 없어서. 그게 무슨 권력이라고 지원부서에서.
잠시 후 전화가 와서는 우선 분실보고를 먼저 하라고 하면서 시말서든 뭐든 쓰시고요... 하고 끊는다.
'음.. 시말서라???? 이게 시말서까지 쓸 일은 아니지.'
내 맘대로 경위서를 작성해서 붙임 문서에 붙이고 써 본적도 없는 공문을 작성한다.
아~ 오늘 칼퇴하려고 했는데... 경위서 작성하다보니 벌써 15분이 지났다.
설렁설렁 놀다가 퇴근이나 하려고 했는데 빡세게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겨우 퇴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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