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이 많은 데 할 수가 없다, 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종이를 펼쳐 놓으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던가, 막막해진다.
'왜 남의 탓만 하는 거야?' 하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잘 생각했어.' 라고 격려해 주고 싶었던 걸까.
나는 언제나 너의 편이어야 하고, 나는 온전히 너의 지지자가 되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매 순간 그럴 수가 없는 건 내가 바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회색이 왜 나쁜거냐고 따져 묻던 시절처럼 이런 동의와 지지가 유치한 편나누기라고 생각되어서도 아니다.
다만, 그건 내가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누구에게 내려주거나, 혹은 그런 전제하에 누군가의 지지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을 경찰에 고발하기로 했어요, 살인미수로.
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은 너에 대한것도, 나에 대한것도, 그 무엇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너는 그날 밤이 새도록 나에게 어떤 메시지가 날아오기를 기다렸겠지만, 그날 밤에도, 그 다음 날에도 나는 너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 줄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결국 너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을 때,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너는 이미 나의 이런 무심한 태도에는 단련이 되어 있다는 듯, 어젯밤에 네가 문자메시지 따위는 보낸 적이 없다는 듯, 마치 처음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그 사람 고소할 거에요. 알아봤는데.. 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야 모든 것이 끝이 날 것 같아." "응. 그래." 나 역시 처음 듣는 생소한 이야기에 미처 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처럼 어쩡쩡한 말투로 "응" "그래" 라고만 겨우 답을 했다.
그녀가 계단에서 굴러 기억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그 사람이 의심스러웠다. 차마 그녀에게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우연히 내가 그 사람과 전화통화를 하게 된 밤, 이야기를 끌어가는 재주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나는 무려 1시간이 넘도록, 그래서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통화를 했다. 단도직입적인, 직설화법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그날만은 어떻게 그날의 상황을, 그때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결국 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는 그즈음 늘상 그녀와 그의 다툼이 원인이 되었던 그 화제로, 그날도 그는 화가 나 있었고,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고, 술이 취해있던 그는 그녀가 계단에서 구르던 정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녀는 계단에서 뒤로 굴렀다고 했다. 그녀는 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등을 지고 서 있었을까? 발을 헛디뎌 비틀할 수 있지만 그는 왜 그런 그녀를 잡지 못했을까? 너무 술에 취해서. 너무 순식간에 그녀가 뒤로 넘어갔기 때문에? 계단을 등에 지고 순식간에 굴러떨어질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그녀가 그 '별로'에 해당될 수는 있지만... 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은 그녀가, 그날 그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와 함께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우리는 그날 헤어지기로 했다, 고 이야기 했다고 그녀가 내게 말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곧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그런데 그녀가 병원에 입원한 후, 그는 그녀의 가족들의 눈을 피해 계속해서 그녀를 만났고, 물론 이사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그녀와 만났을 때에는 일정의 거리를 두는 듯한 이야기를 했다.
몇달이 지나도록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그녀는 최면치료를 시작했고, 어느 날 계단에서 자기를 미는 피묻은 손을 보는 장면을 봤다고 했다. 너무 공포스러워해서 최면이 중단됐고, 그 뒤 또 오랫동안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아직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퇴원을 한 그녀는 자기가 계단에서 굴렀다는 그 장소와 그날 함께 있던 사람을 수소문했다. 그남자는 술이 취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만 해서 여자가 그 단서를 찾아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날 남자와 여자 외에 남자 친구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사고 이야기를 듣던 날 들었지만 남자는 그의 친구는 그녀가 그날 처음 만난 사람이었고, 먼저 계단을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의 친구를 만나게 해 주지 않았다. 물론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냥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가, 언젠가부터 그남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그녀가 드디어 그날 그남자와 만났던 장소를 찾아냈다. 크지 않은 동네에 앰블런스까지 왔을 정도면 그 장소의 종업원은 틀림없이 자신을 기억할 수 있을 거라는 그녀의 확신대로 종업원은 그녀와 동행한 두 남자와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종업원도 현장을 보지는 못했지만 비명을 듣고 달려나갔고 앰블런스가 빨리 도착하지 않아, 결국 그남자가 택시로 그녀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고 했다. 앰블런스로 병원을 갔다는 그남자와의 진술이 어긋났다. 그리고 종업원은 그날 그남자가 팔을 다쳐 피가 많이 났고, 그남자의 친구가 인근 약국에서 치료약을 사왔다고 했다. 그녀는 최면에서 봤던 팔에 피가 흐르는 남자를 찾아야겠다고 했는데, 안그래도 미심쩍던 그남자가 바로 자신을 계단에서 민 사람이라고 거의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두어달이 지난 밤, 나는 그녀의 문자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종업원을 만나 현장확인을 하고 모든 정황증거로 그남자가 충분히 의심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그녀는 그렇게 단언하지 않았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을 고발해야 하는 걸까... 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전날 다시 최면치료를 했는데 그 남자가 화를 내며 자신을 계단에서 미는 장면을 모두 보았다고 했다. 그 순가 나는 '그건 정말 잠자고 있던 그녀의 기억이, 그녀가 잊고 싶어했던 기억들이 최면을 통해 살아난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알아낸 정황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기억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최면으로 알게된 정황은 증언에서 얼마만큼의 효력이 있는 걸까,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남자때문에, 자신은 몇달간 입원을 해야했고, 교통사고가 났고, 기억을 잃었고, 그리고 지금 또 다른 이유로 병원에 있다고 했다. 자신만이 온갖 어려운 일을 다 겪고 있는데 그게 다 남자 때문이라고. 이런 방법이 아니고는 정리가 안 될것 같다고 했다.
나는 다시,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왜 꼭 한 사람만의 책임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모든 고통은 여자만 받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를 선택한 너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해...라고 자꾸만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있다.
언젠가 나는 어떤 사람의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어주고 싶었드랬다.
세상 어떤 이가 그 사람을 비난한다 하더라도 나만은 그럴만한 상황이었겠지, 그 사람이 잘 생각하고 선택한 거겠지,... 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그녀는 내게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마다 두어 발자욱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아니 약간은 그녀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나의 이성적이라고 믿는 판단에 하나도 부합하지 않는 그녀도,
그냥 온전히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나도,
나는 자꾸만 답답하다. 아니 사실 그런 나 자신이 더 답답하다. 절대적인 지지자도, 그렇다고 이성적인 조언을 해 주는 친구도 되어주지 못하는 어쩡쩡한 내 자신이 너무 못났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순간에도 그 남자를 의심하며 어떻게든 그날의 상황을 밝혀내고 말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막상 그녀가 내가 의심했던 상황대로를 밝혀내고 있자,
오히려 도망치려고 한다. 왜 그럴까...
사람과 사람사이.
끝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과 사람사이...... 아마도 그 때문인 것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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