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길이 밀린다.
창밖을 기웃해 보지만 꼼짝않고 서 있는 차들만 눈에 들어올 뿐.
이러다 지각하겠네. 지하철로 갈아탈 수도 없고, 내려봐야 어차피 이 버스노선 그대로 가야 회사에 도착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벌써 한 자리에 서 있은지 10분이 넘어가는 버스 안에서 남자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 모두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고 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통화를 하기 시작한다.
저 좀 늦을 거 같아요, 차가 안 움직여요.. 죄송해요.
그때부터 마치 누군가가 먼저 이 상황을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통화소리가 들려온다.
사고가 난거 같아.. 월요일도 아닌데 너무 밀려서.. 죄송...
이제 사람들은 모두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난 사람들은 좀전까지의 불안, 초조했던 표정이 여유, 느긋,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나도 연락을 해야 하나... 남자는 잠시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려본다.
그리고는 이내
에이, 그냥 가서 말하면 돼지. 하고는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남자는 늘 그랬다.
늦었다고 깜빡거리는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넌다거나, 서둘러 택시를 잡아탄다거나 하지 않았다.
전화라도 해 주면 좋았을텐데 잠시 망설이다가는 그냥 가서 말하지 뭐.. 하고 관두기 일쑤였다.
여자는 그게 불만이었다. 왜 연락을 하지 않느냐고, 얼마쯤 늦는다고 연락해 주면 자기도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처음에는 그냥 조금 늦는 거니까.. 코리언타임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그래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전화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게 어색하기도 하고 해서 만나면 미안하다고 해야지... 생각하고 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늦는다는 말에 알았다고 대답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실망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그게 또 미안해서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여자의 투덜대는 소리가 싫어져서, 괜히 전화해서 먼저 지청구 듣지 말고 도착해서 한 번만 들어야지.. 하는 마음에 연락하지 않았다.
버스는 그 모퉁이에서 15분 정도를 더 버벅댔다. 화물차에서 물건이 떨어져서 교통체증이 있었다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남자는 냉랭한 공기를 느끼며 어깨를 움추린다.
일찍다녀라.
아..네... 차가 밀려서... 죄송합니다.
컴퓨터를 켜자마자 메신저가 깜빡인다.
선배, 늦는다고 연락을 주지 그랬어요. 오늘 팀장님 심기 불편해요.
몹시 추운 겨울 날이었다.
그날 따라 남자는 더 많이 늦었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깨보니 약속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던 거다. 막 집을 나서는데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자는 조금 늦을 거라고만 했다.
눈이 와서인지 길이 밀렸다. 평소에 전화를 잘 하지 않는 여자인데 그 날은 두 번이나 전화를 해서 어디만큼 오고 있는지 물었다. 대충 얼버무리고 끊었는데 30분을 넘게 기다린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돌아서 버렸다.
정말 추웠다고. 많이 늦는다고 하면 어디 들어가 있겠다고 전화한 거였다고 했다.
선배.. 다음부터는 미리 연락주세요. 컴퓨터라도 켜 놓을께요..
점심을 먹으면서 지환은 마치 자기가 부주의해서 지청구를 듣기라도 한듯 연신 미안해하며 말을 한다.
한 번은 해야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은 어떤 순간에 하든, 하기 싫은 말이었다.
남자는 스스로 참 못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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