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날씨

헤어지던 날 (1)

약간의 거리 2007. 7. 25. 23:59

-우리.. 그만 헤어지자.

여자의 말에 남자는 잠깐 멍해졌다.

-응?

-헤어지자고, 그만

-왜?

 

아까... 극장에서 남자가 손을 잡을 때마다 자꾸만 슬그머니 빼 가던거... 이 말을 하려고 그랬던 거구나. 극장에 오면 먹어주는 게 예의라고 하던 팝콘을 먹지 않겠다고 한 것도 이 말을 하려고 그랬던 거구나.. 남자는 그제서야 조금씩 낯설던 여자의 행동에 이유가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우린 너무 많이 다르잖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고 너도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여자는 마치 합의된 이별의 절차를 밟고 있다는 듯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남자는 시험지를 받아들고서야 시험범위를 잘 못 알고 있었다는 걸 발견한 학생처럼 머릿속은 텅 비고, 눈 앞은 하얗기만 해서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응." "응" 하면서 대답만 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겨우 "좀 걷자" 하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문득, 오늘 집 주인과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게 생각 났다.

 

-잠깐만. 나 전화 한 통만 하고.

 

"응" 이라고 말하는 여자에게 "사실.. 오늘 집 주인이 찾아온다고 해서 일찍 들어갈 생각이었거든..." 하며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놓는 자신이 남자는 너무 옹색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이게 며칠만에 하는 데이트인데 저녁에 다른 약속을 잡을 수가 있냐고 지청구를 했을텐데.. 엷은 미소만 띄고는 가만히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사실 남자는 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하면 구박을 좀 덜 들을까 해서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친절하려고 신경도 쓰고, 평소에 여자가 보고 싶다던 영화도 기억해 내서는 예매도 했다. 그래야 일이 있어서 좀 일찍 헤어져야 한다고 말해도 여자가 덜 삐칠테니 말이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이별선고를 듣게 된거다.

어쩌다 크게 싸우다가 여자가 분을 삭히지 못하고 "그냥 헤어져!" 하는 적은 있었지만 그것도 참 오래된 일이다. 오래된 연인은 가족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놀랄만큼 즐거운 일도 없고, 반면에 쉽게 토라지거나 싸우는 일도 없었다. 그저 언제나 딱 그 자리에 있는 그런 관계가 좀 지루하게 느껴지질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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