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날씨

눈물나게 맑은 봄날이야!

약간의 거리 2007. 5. 23. 11:44

남자는 아침에 그만 늦잠을 자버렸다. 알람을 끄고 잠깐 누워 있었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지도 않았으니 다시 잠이 든 건 아니었다. 그냥 좀 멍하니 누워있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허둥대며 뛰어나왔는데 15분에 한대씩 오는 버스는 방금 출발한 참이었다. 아직 신호에 걸려 저 앞에 서 있지만 보나마나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승하차를 하면 벌금을 낸다나 하는 이유로 언젠가부터 버스는 정류장에서 조금 지나간 신호에 걸려 서 있을 때에도 사람을 태워주는 법이 없다. 지하철하고는 다른 버스만이 가진 매력 중 하나가 상실된 것이다. 

버스 안내양이 사라졌을 때, 버스를 보고 인간미가 없어졌다고 말하던 건 아마도 지금 이런 것과 유사한 느낌일 거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남자는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 만원버스까지는 아니지만 사람이 제법 많다. 숨이 턱 막혀 온다. 벌써 날씨가 제법 덥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창문을 조금만 열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몸이 심하게 휘청였다. 중심을 잡아보려고 하는데 그만 옆에 여자의 발을 밟아버렸다.

"미안합니다"하고 고개를 드는데 여자의 표정에 찬바람이 쌩~한다. 괜히 기분이 언짢다. 버스가 심하게 요동친 탓이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으면 됐지 저렇게 불쾌한 표정을 지을 건 뭐야고.

감색 스커트에 아이보리빛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의 옷차림은 튀지도 않고, 아주 말끔하지도 않고, 그냥 보통이다. 구두, 가방... 너무나 차림이 평범해서 어쩌면 숨어서 살고 있는 스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다, 저 여자, 저렇게 차가운 성격갖고는 아무래도 스파이로 살기엔 적당치 않다는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무래도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라 생각하면 고개를 흔든다.

오전에는 과장에게 불려갔다. '불려갔다'는 건, 좋지 않는 느낌이다. 벌써 직장밥 몇년째인가! 그 음의 높낮이만 들어도 맑음, 흐림, 심심풀이 땅콩임,.. 뭐 이런 걸 구분할 수 있는 짠밥이다. 그런데 요사이 뭐.. 불려갈만한 일은 없는데 뭘까?


아, 며칠 전 올린 결재서류에 데이터가 잘못 됐단다. 대체 뭐 그런 말도 안되는 실수를 저지른 건지.. 숫자 한 두개 틀린 것 치고는 댓가가 좀 큰, 그래서 그냥 실수라고 넘어가기엔 조금 더 치명적인 일이다.

피곤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데 날씨가 참 좋다. 정말 좋다. 눈물이 나올만큼 좋다.


우울해...  왜?  날씨가 너무 좋아서.
오늘 같은 날 함께 있다면 여자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날씨가 너무나 좋아서 우울하다고. 비가 오면 눈 맞은 강아지처럼 팔짝거리며 좋아하면서, 비오는 날의 사람들의 우울함마저도 사랑한다면서, 이렇게 화창한 날에는 이상하게 우울해하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딱 한 번, 비가 오는 걸 싫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내일은 날이 맑았으면 좋겠어. 비오는 거 별루야."
버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는 짐짓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 남자는 자꾸만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뒤돌아 봐달라는 여자에게 비가 와서 우울한 것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내일은 날이 맑았으면 좋겠어. 하는 여자의 음성이 자꾸만 귓가를 맴돈다. 아니야, 나는 지금 날이 너무 맑아서 우울해.

아침부터의 짜증과 피로가 몰려오면서 남자는 문득 술이 먹고 싶어졌다. 어쩌면 맑은 날 여자가 느낄 우울함이 전이되어 왔는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어, 나야. 오늘 술 한잔 할까?
너 별일이다.
왜?
이런 대낮에 전화해서 술 먹자고 하고. 무슨 일 있냐?
아니, 회사에 좀 머리아픈 일이 생겼어.


 

제법 많은 양의 술을 마셨던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지금이 몹시 늦은 시간이라는 건 알겠다. 시계가 어느새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다.
내일은 날이 맑았으면 좋겠어. 다시 여자의 음성이 귓가를 맴돈다. 남자는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아니야, 받지 않을 지도 모르잖아. 핸드폰은 이게 나쁘다. 공중전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여보세요?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자다가 일어났지만 여전히 여자는 목소리가 참 맑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여자는 짜증을 내지 않는다. 그녀는 친절했었나? 잠시 후 전화가 끊긴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술 마시면 전화를 꺼 놓기로 해 놓고선. 남자는 짧은 후회를 한다. 그런데 자꾸만 여자의 음성이 들려온다.
내일은 날이 맑았으면 좋겠어.  여보세요~

남자는 다시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 ... 여보세요,

잠시 숨을 고른 여자가 다시 "여보세요" 하고 말한다. 어쩌면 전화를 건 상대가 남자라는 걸 알고 있는 눈치다. 더 이상 말이 없는 여자다. 하지만 아까처럼 전화를 끊지는 않는다. 마치 이제는 남자가 말을 해야 하는 차례라는 듯이,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조용히 전화를 끊는다.

 

그냥... 날씨가 눈물이 나올만큼 좋은 봄날이었기 때문이라고... 내일은 비가 오면 좋겠다고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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