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부러지지 않는 사람

약간의 거리 2004. 3. 25. 23:52

편치 않은 회식자리.

원래 이런 자리 참석하는 거 싫어하지만, 분위기가 거부할 수 없게 만들 때가 있는 법이다.

 

고기를 구워 먹는데...

다 같이 먹는 자리에서 누군가 먹지 않고 열심히 고기만 굽고 있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아, 그런데 하필 내가 앉은 테이블에 그런 사람이 있는 거다.

스스로 고기굽는 역할을 맡는다는 것에 대해 꽤나 가정적인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원하는 걸 먹으라고 해서 문 앞에 앉은 사람이 등심을 주문했는데

-아줌마, 여기 목살은 없나?

-난 목살이 좋은데... 싼거 먹을라고 그런다고 할까봐 못 시키겠네. 시켜도 돼지?

-고기는 왜 그렇게 작게 잘라. 덩치들 보면 많이 먹는지 모르겠어?

-이게 2인분 맞아요? ... 허~ 2인분 달라니까.

-내가 오늘 좀 시비를 많이 거나? 말도 많고...

 

그치만 그런 말 하고 있는 분은 우리 직장의 대빵인 걸.

 

오늘 뭔가 기분이 좋으신 걸까? 아니면 그간의 미안함 때문에 저러시는 걸까?

 

아무튼 밥은 진즉에 다 먹었는데 그리고 나서도 한시간 반이 넘게 이어지는 농담, 농담 속 진담, 진지한 고민, 앞으로의 계획 등등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다리도 아프고, 지루하고, 졸립구.

 

사실... 내가 정말 싫었던 건,

아주 솔직히 말하면... 길고 긴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아주 바싹 구워진 고기와 양파를 좋아하는데

자꾸만 설핏 익은 고기들을 아예 불판 밖으로 꺼내 놓으며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 때문이었다.

불위에서 노릿노릿 익어야 하는 고기가 익지 못하는 것도 괴로운데

불 밖에 나와 차갑게 식어가야 한다니...... 입맛을 소중히 여겨주는 풍토가 몹시도 그리운 저녁식탁.

 

 

 

그런데 정말 나이라는 건 꽁으로 먹는 건 아닌가보다.

 

-요즘 이혼율이 높다고 해서 말인데... 나도 젊을 때는 2주씩 말 안하고 지낼때도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기 죽어서 지내지. 나이들어서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그래야지 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저쪽에서 칼을 들이대면 목을 돌려 피하면 되는데 똑같은 칼로 맞서잖아. 그래봐야 둘다 죽는건데. 진검승부를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는건데... 부러지지 않는 게 더 중요한 거라고.

 

진검승부 보다는 부러지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그래.

나는 그동안 너무 쨍!!~~ 소리나게 살아온 것 같다.

부러지지 않는 게 더 중요한 건데.

부드럽게 휘어지면 절대 부러지지는 않는 건데.

 

이런 말이 귀에 쏘~옥 들어오는 건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뜻인가?

 

이런, 무거운 철은 들지 않는다는 게 내 삶의 지론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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