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나의 만화 이야기

약간의 거리 2005. 10. 28. 11:24

 

만화를 처음 본 건 중학교 때였다.

아마도 1학년? 2학년?

그때 아주 가파른 경사길을 올라야 갈 수 있던 우리집.

겨울이면 눈이 얼어 붙은 그 길을 어떻게 내려와 학교에 같는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아주 가파는 길.

그 길의 중간쯤에 아주 자그마한 만화가게가 있었다.

언니 친구를 따라 처음 간 만화가게에서

언니 친구가 권해준 황미나의 "안녕! 미스터 블랙" 이라는 만화를 처음으로 봤다.

 

두권 짜리였나?

 

아주 재밌었다.... 라는 기억밖에는.

 

 

그리고 또 얼마만큼, 아주 많이, 시간이 흐른 뒤에 만화를 봤는데...... 재미가 없었다.

한 페이지에 서너글자나 있을까, 말까, 해서

그 속도로 읽다가는 다음 장을 넘겼을 때 앞에 이야기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더구나 사람들은 다 똑같이 생겼다.

아까는 검은 머리였던 것 같았는데

넘어와 보면 황금빛 머리결이고...  (후훗~ 그런데 이건 좀 웃기다. 그 만화는 흑백이었는데... 난 어떻게, 흰 머리와 황금빛 머리를 구분했을까??)

머리를 묶었다가 풀어놓으면 다른 주인공이랑 똑같이 생겼고,

그걸 따지다 보면

또 아까 그 이야길 누가 했는지 기억이 안나고,

그러다보니 읽는 속도도 느리고.

 

 

그 시절 만화가게는 시간당 얼마... 그렇게 계산을 했다.

그래서 아무리 빨리 읽으려고 노력을 해도 40분에 겨우 한권을 읽는 나에게는 너무 불리했다.

 

 

 

그리고 또

아주 아주 많이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흘러서

이제 친구들은 만화 같은 거 보지 않는 나이가 되어서 보게된 만화가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다.

 

그 만화가 재밌었던 건,

무엇보다고 그것이 역사물이었기 때문이고,

그저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었으며

더구나 그 사랑의 중심이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화에 이런 것도 있구나!

 

그렇지만 대부분의 만화라는 것이, 완성되어 있지가 않았다.

아주 예전에 다른 사람들이 다 봤다고, 재미있다고 해서 찾아보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 하나가

김혜린의 <불의 검>

 

등장인물도 많고,

여전히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얘가 누구였지? 아까 이렇게 생겼었어?' 하면서 몇번씩 되돌아와야 했지만......

그리고 결국 기다림에 지쳐 다음권이 나올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봐야만하는 반복에 지쳐

'완결되지 않은 만화는 절대 보지 않을거야!' 하고는 덮어버리게 만들었던......

 

 

 

 

 

 

그 만화가 돌아왔다.

이렇게 뮤지컬이 되어서...

아라와 산마로가 뛰어 다닌다.

그림보다는 아름답지 않지만,

그림에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가진 이들이다.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

2시간3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제한된 출연진에,

그리고 제작비에,

 

수십년의 세월과, 수많은 등장인물의 얽히고 설킨 감정의 끈들과,

미움과 사랑이,

원망과 애절함이,

모두 담기엔 너무나 많이 부족했지만.......

 

저 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구나!

그렇게 밉기만 했던 수하이바토르를 결국엔 모두 안타깝게 사랑할 수밖에 없구나!

 

 

짧은 공연 시간이 끝나고,

그들은 모두 다시 만화속으로 들어갔다.

무대 인사를 하고,

모두가 막뒤로 사라졌다.

 

이제 다시

눈을 깜빡이지 않는,

노래를 부르지만 들을 수 없는,

하지만,

내가 대신 아라가 될 수도 있는,

만화 속에서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어떤 남자가 좋으냐고 묻던 친구에게 언젠가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아르미안의 네딸들 전권 사다주는 남자!"

"너 만화 안 좋아하잖아?"

"그치만 내가 그런 만화를 좋아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좋아."

 

 

여전히 나는 만화책 읽는 속도도 느리고,

그림과 글씨를 함께 봐야 하는 만화가 너무 힘들지만......

언젠가 생길 나의 남자친구는 나와 함께 뮤지컬 불의검을 보고는, 다음날 그 만화책 전권을 사들고 오면 좋겠다.

 

*^^*

'┎thou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태어났니?  (0) 2005.11.04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0) 2005.11.02
너의 죽음  (0) 2005.10.18
돛단우산  (0) 2005.09.01
미안해...  (0) 2005.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