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혼자라서 외로운 것은 아니다

약간의 거리 2003. 10. 21. 10:55


요즘 들어 엄마가 아주 가끔씩, 것두 조심스럽게 결혼이야길 꺼내곤 한다.
결혼을 하려면 이런 사람은 안 되고, 어떤 사람을 만나야 되고.....
-누가 결혼 한댔어?
-해야지..
-왜? 이제 나 델꼬 사는 게 구찮아 진 거야?
-아니.. 그래두 엄마가 언제까지 너랑 같이 살 수는 없는 거고...
다들 결혼했는데 나중에 너 혼자 돼서 불 꺼진 집에 들어오고 해봐.. 쓸쓸하지.

불꺼진 집.
나는 사실 불꺼진 집에 들어오는 걸 좋아한다.
여기서 ‘불꺼진 집’이란 아무도 없는 빈집을 말한다.
식구들이 모두 잠들어 ‘불꺼진 집’은 혹시라도 삐걱대는 현관문 소리에 엄마, 아빠가 일어나 야단을 칠 수 있기 때문에 몹시도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류의 ‘불꺼진 집’은 싫다.

때문에 식구들이 모두 어디론가 가서 집이 비는 날.
나는 몹시도 설렌 마음을 갖고 서둘러 집에 간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열쇠를 넣었을 때 “딱” 하고 열리는 소리를 나는 좋아한다.
불을 켜고,
라디오를 켜서 볼륨을 높이고,
주방에 들어가 무엇이든 만든다.
집에 가서 뭘 만들어 먹을까...를 고민하는 것도 나를 설레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나는 음식을 별로 못한다.
만들 기회도 없고,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간을 못 맞춘다.
그래서 내가 만든 음식은 늘 어딘가 조금은 덜 된 듯한 맛이 난다.
하지만 나는 뭔가 만들어 먹는 걸 좋아한다. -다행이도 남들한테 먹이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거실에 엎드려 내가 만든 음식을 천천히 먹으면서 책을 본다.

우리 집은 애들이 많았다.
그래서 뭔가를 천천히, 여유롭게 먹어 본 기억이 없다.
딱히 경쟁심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먹을 때는 말이 많아지는 것 만큼이나 먹는 속도도 빨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 즐기는 이 여유가 좋다.

그리고는 세탁기를 돌리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나는 청소기를 돌린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내가 절대 하지 않는 것들이다.
빨래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하지 않는 일>로 낙인 찍혔고,
청소에 대해서도 몇 해 전부터 엄마가 포기했다. ㅋㅋㅋ
그렇지만 혼자 있을 때 나는 집이 깨끗한 게 좋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는 거다.


엄마가 염려하는 또 한 가지는 혼자는 너무 쓸쓸하다는 거다.
하지만 난 쓸쓸하고 우울한 걸 즐긴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의 탈피법이라는 게 있다.

어떤 사람은 신나는 음악을 듣거나, 춤을 춘다고도 하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외로움에 집중되지 않을 수 있는 뭔가를 찾는다.
또 혹자는 흡연자에게는 금연을, 금연자에게는 흡연을 권하기도 한다.
그리고 쓸쓸하고, 우울한 기분에 그냥 몰입하라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이런 여러 가지 부류 중
우울이나 쓸쓸을 남과 나누지 않는 쪽에 속한다.

방에 웅크리고 앉아 우울하고 쓸쓸했던 생각들을 곱씹거나 슬픈 음악을 골라 들으면서
그 감정의 바닥을 치는 것이다.
무엇이든 바닥에 닿으면 다시 치대고 올라오는 법이니까.


때때로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도 못 견디게 쓸쓸한 법이다.
혼자라서 외롭고 쓸쓸하다는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