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우리집은 전쟁중

약간의 거리 2003. 9. 30. 15:55

싱크대 위에 고이 놓여 있는 두부.

"엄마~ 두부 안 먹어?"
"안 먹어. 먹고 싶은 사람이 가고 없는데 뭘 먹냐."


퇴근을 하고 집에 갔는데
공기가 영~ 심상치가 않다.

할머니는 삼촌댁에 가서 주무신다고 하셨다고,
막내네는 벌써 집에 갔단다.
그럴리가 없는데... 보통은 10시나 되어야 집에 가는데...

엄마는 계속 속이 아프다면서도 옷장 정리부터 시작해서 내 화장대까지 말끔이 치우고 계신다.

음~~~
틀림없이 오늘 또 임신 4개월째의 동생과 엄마가 다툰 것이다.

'오늘은 좀 심각했던 모양이군.'

나는 괜시리 엄마한테 주변머리 없는 농담을 던져 댄다.
눈치 없는 울언니 (아빠는 착해서... 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정말 눈치가 없다.)

"엄마랑 막내랑 또 싸웠어. 엄마 기분 안 좋아. 막내는 울고 갔대."

주저리주저리 일러댄다.
바부팅~! 나도 벌써 눈치 챘다구. 그걸 엄마 앞에서 늘어 놓으면 어쩌냐?



우리 집안의 첫 손주.
내가 엄마 놀리느라 늘 하는 이야기

"할머닌 꽁으로 되는 줄 아우?"

정말이지 그건 "꽁"으로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엄마의 새로운 시집살이는 동생이 임신한 사실을 안 직후부터 시작됐다.
애가 어찌나 예민한지 산부인과에서 임신 여부 확인이 불가능한 때 이미 육감으로 자기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
병원에서 2주 뒤에 오라고 해서 모두에게 쉬쉬 했지만,
소문이란 것은 쉬쉬하며 퍼져 나가는 것인지라
다시 병원에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기 전에 모든 집안 사람들이 이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 동생도 안되긴 했다.

"○○! 나 임신했어"
하고 말할 때마다 돌오는 대답은 하나 같이
"어... 알고 있었어..." 하는 어색함 뿐.
깜짝 뉴스에 연이어 터지는 축하는 구경도 못한데다가 설상가상
언니가 2년이나 일찍 결혼 했지만 2세 소식이 없는 터라
부모님도 내놓고 좋아해 주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입덧이 시작되면서
밥냄새가 싫고,
느끼한 것도 싫고,
고추가루가 1개라도 들어가면 속이 뒤집히고,
참기름은 절대 안돼
김치 냄새도 역겨워~

우잉~~

난 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입덧과 관려된 고된 이야기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입덧이라 여겼는데,
딸 수발 들어야 하는 엄마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나 보다.
첨엔 과일만 먹는 딸을 위해 비싼 과일을 척척 사 들고 오더니,

어느새 주머니도 가벼워지고,
진짜로 음식을 만들던, 그렇지 않던
뭔가 비위에 맞는 걸 먹여야 한다는 심적 중압감이 컸는지
어느새 제풀에 지쳐 버린 거다.

거기에다 임산부의 잔소리와 신세한탄은 어쩜 그렇게도 끊이질 않는지
다른 건 다 참을만한테 신세한탄은 좀......


아무튼 동생과 엄마의
등돌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그 <신세한탄> 이었던 것이다.

말리는 결혼을 우격다짐으로 했으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는 게 엄마의 마음일 거고,
친정이 아니면 어디가서 하소연 하느냐는 섭섭함이 동생의 입장일 거다.


어쨌거나 엄마는 어제밤 내내 속이 아팠고,
낮에 통화해 보니 동생은 말없이 전화기 저편에서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부분이고,
관심조차 가져 본 적 없는 분야라서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조차 없다.

조카가 태어날 때까지 정녕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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