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청계천 8가

약간의 거리 2003. 8. 27. 17:19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니는 청계천 길은

언제나 조금은 음산하고, 지저분하고, 우울한 분위기다.

어둠이 깔린 후에는 쓰레기더미 썩는 냄새까지 진동해서

집까지의 구간 중 가장 지나고 싶지 않은 곳이다.





고가 철거작업이 시작되어 상판과 기둥이 사라진 청계천은 아주 새로운 모습이다.

파란 하늘과 넓은 도로가 드러나면서

청계천길은 더 이상 음산하고 우울하지 않다.

그 길을 지나는(길이 밀려 절대로 달리지는 못한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창밖 세상은 밝다.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따뜻하다.



때문에 고가 철거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버스 노선이 변경되어 정류장에서 사무실까지 걸어야 하는 거리도 멀어지고,

덕분에 출퇴근시간도 평균 20분 이상 길어졌지만

나는 마냥 좋았다.



청량리 방향에서 오는 옆사무실 친구가 매일같이 서울시장을 욕하고 청계고가 철거를 반대해도,

“응.... 나는 시장은 싫어도 고가 철거는 좋은데....” 했다.



그런데 문득,

이제 바닥을 뜯어내는 작업이 얼마남지 않은 즈음이 되어서야

청계천이 쓸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 틈 없는 인파로 가득 찬

땀 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 서린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부부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 빈 거리여

칠흙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워-워-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괜시리 천지인의 노래 청계천 8가를 자꾸만 읊조리게 되고,

늘 우울하고, 위험한 거리로만 느껴지던 청계고가 아래의 조명상가, 공구상가들이

머지 않아 그리워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지금은 수녀원에 들어간,

대학시절 이 노래를 참 좋아하던 언니가 그리워진다.

언니가 다시 나오는 세상에서는

땀 냄새 가득한,

리어카꾼의 욕설이 난무한,

맹인가수 부부의 노래가 울리는,

가난한 풍경의 청계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사라진다는 것은 쓸쓸하다.



하지만

맑은 개천이 흐르고 푸른 나무가 있는 공원이 조성된 후에도

나는 지금의 청계천을 그리워하게 될까?



......



역시나

무엇이든 잊혀진다는 것은,




쓸 쓸 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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