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는 시간부터 집을 나설 때까지 한 시간 여 동안 TV 채널은 시시때때로 돌아간다.
운이 좋은 날은 다섯 번까지 일기예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뉴스를 보면서 집 나설 채비를 한다.
귀를 열어 두고 방안에서 열심히 파우더를 두드리는데 갑자기 여자 앵커가 말을 더듬는다.
'모야? 왜 저래~~~' 하며 고개를 삐죽 내밀었더니
뉴스 속보가 전해진다.
현대 정몽헌 회장이 자살을 했단다.
아무개가 자살 했다는 이야기는 요즘 뉴스 시간대별로 빠지지 않고 한 두건씩 보도가 된다.
그래서 이제는 그닥 끔찍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면역이 되고 있는데...... 저 사람의 소식은 그래도 좀 충격이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 대부분은 빚 때문이다. 한마디로 먹고 살기 어려우니 죽는 거다.
그런데 저 사람은 느닷없이 왜 죽었을까?
사람들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 종종 뉴스에서 보고 들은 죽은 아무개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난 두 가지 면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싫다.
우선은 밥 먹는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주제로 올라온다는 게 싫다. - 그러고 보면 아직 끔찍함에 대한 면역이 덜 되었나 보다.
그리고 죽을 용기 어쩌고 하면서 몇 천만 원의 빚을 대수롭지 않은 액수로 이야기하는 게 싫다.
어쨌든 그들은
밥 벌어 먹을 직장이 있고,
돈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지 않으며,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에 단 몇 백만 원 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다.
큰 여유돈은 없지만 갖고 싶은 명품 브랜드의 옷을 사 입고는 그 돈을 어찌 갚나? 마음 졸이며 살지 않는 사람들이
죽음과 맞바꾼 남의 삶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게 듣기 싫다.
“오천만 원을 왜 못 갚아? 식당가서 일 해도 백 만 원은 더 버는데...” 하는 소리가 듣기 싫다.
다시 채널이 돌아간다.
긴급 속보가 또 전해진다.
정 회장의 살아서 모습이 자료 화면으로 나온다.
아마도 검찰 출두하는 장면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는 얼굴이 보인다.
친구 신랑이다.
정 회장에게 바싹 붙어 서서는 다른 기자들에게 조금의 틈도 내 주지 않으려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그의 취재 열기가 마치 카메라에 얼굴이 꼭! 나왔으면 하는 사람처럼 보여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곧 우울해졌다.
‘저런 뉴스를 보면서도 웃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자들의 취재 열기라는 건 정말 무시무시하다.
6.15남북공동합의문 발표 후 첫 이산가족 상봉이 남측에서 열렸을 때,
나는 북측 방문단이 머문 쉐라톤워커힐 호텔에 있었다.
취재진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뭔가를 끊임없이 말 해주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차례 반복해서 이야기하다 지쳐한다.
그 틈에서 취재진들은 남이 미처 담지 않는 내용을 녹음해야 하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
오로지 목소리 밖에 내보낼 게 없는 라디오 방송국 소속은 마이크를 가까이 대기 위해 목숨을 건다.
뒤에서는 카메라 기자들이 난리다.
카메라 박스를 밟고 올라서고 앞 사람을 향해 욕지거리도 불사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이크만 들이밀면 되는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마이크만 손을 뻗혀 올린다.
가장 불쌍한 건 신문기자다.
귀를 쫑긋 새우고 모든 이야길 받아 적어야 하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게 만드는 직업들이 싫다.
그걸 알아내려고 007 작전을 불사하는 사람들이 싫다.
그런데 돌아보니 나도 그걸로 밥 벌어먹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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