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2000/11/8 수---입동이 하루 지난 몹시 추운 밤에...

약간의 거리 2000. 11. 9. 11:36

가끔씩 고개를 들어 몰래 그를 바라보곤 합니다.
어떨 땐 혹시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그가 눈치라도 챌까 싶어 살짝 눈만 치켜 뜨기도 하지요.
매일,
바로 곁에서 그를 지켜 볼 수 있다는 건
물론 대부분 기쁨이지만
가끔은 가슴을 쓸어 내리는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가 조금씩 털어놓는 지난, 아니 아직 가슴에 남아 있는 사랑의 얘기들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추억을 들쳐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니… 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해도해도 어느 순간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마음이 저 혼자 삐져 있기도 합니다.
그를 외면하려고도 해 보고
그를 향한 관심을 멈춰 보려고도 하지만
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바로 내 마음인가 봅니다.

책상에 엎드려 그를 보고 있습니다.
얼굴을 보면 그가 시선을 느낄지도 몰라서 단정하지 못한 그의 넥타이 끝을 바라 보고 있습니다.
점심때 회사 여직원이 그의 넥타이가 형편없다고 했습니다.
어쩜 그런 넥타이를 매고 왔는지 얘기해 주고 싶지만 참았다면서 말입니다.
그 얘기를 듣는데 저는 그냥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언젠가 그가 넥타이 얘기를 한적이 있었어요.
“나는 사실 색깔이 분명하지가 않으니까 그냥 사는 건데… 가끔씩 사람들이 내 넥타이가 너무 화려하다고 하더라구. 촌스럽다고도 하고…. 나는 잘 모르지…”
그는 색맹입니다.
그래서 아마 오늘 그가 매고 온 넥타이 속의 붉은 빛깔도 몰랐을 겁니다.
그 붉은 빛깔이 다른 색깔들과 어떤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는 더더욱 몰랐겠지요.

예전 같았으면 그런 말 하는 사람들
화 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을텐데……
오늘은 그냥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그 손길이 왜 그렇게 흐뭇하고 따뜻한지…
“왜요?”
“예뻐서 그런다.”
“피~”
“피이?”
“거짓말인거 다 알아요.”


잠깐 음반을 찾으러 다녀왔는데 그는 이미 가 버리고 없습니다.
‘음반 찾아오라고 신분증 주고 갔으면서…
가는 길에 자료실에 들러서 인사라도 하고 갈 것이지…’
잠깐 섭섭한 생각이 스칩니다.

내가 잠깐만 섭섭할 수 있는 이유는
지난번처럼 운동을 마친 그가
“아나스타냐! 끝났니?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 줄까?”
하고 전화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가 전화를 하면 저는 “그냥 가세요” 하고 말 할겁니다.
왜냐면…
지난번에 그가 들고 온 운동가방이 너무 크고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늘은 날씨가 너무 춥거든요.

그가 먼저 가버린 1시간의 길고도 지루한 방송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내 계산으로 그가 운동을 마치려면 조금은 더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그의 전화를 기다려보고 싶지만
저는 서둘러서 나가봐야만 합니다.
공원 앞의 학원버스가 떠나기 전에 기사 아저씨들을 만나봐야 하거든요.

아저씨들과의 얘기는 소득도 없이 아주 싱겁게, 5분도 안되어 끝나버렸습니다.
그가 전화를 할까?
여기서 그가 전화하길 기다려 볼까?
그리고 어디니? 하고 물으면,
오목공원이에요.
아니에요. 추우니까 그냥 가세요. 하고 말해야지.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는 그냥 걸음을 재촉합니다.

어제는 정류장에 채 도착도 하기 전에 왔던 버스가 오늘은 한참을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그의 전화도 오지 않구요.
버스를 타고 얼마를 갔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그 입니다.
“재빨리도 갔구나…….. 조심해서 가라.”


나의 마음이 자꾸만 그에게로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아아,
어찌하면 좋을까요.



나의 마음이 지금 상태에서 멈춰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이별을 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냥 이 정도의 거리에서
언제까지나 그를 지켜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그의 마음이
나는 참 좋습니다.

나의 마음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마음처럼
이제 그만 이 자리에 멈춰 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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