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아직은 시간이 필요해

약간의 거리 2005. 7. 29. 23:22

 

사랑이란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인 줄은 몰랐어

-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중 -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사랑이라는 건 조금씩 스며드는 거라고...

 

지난 밤에 프로포즈를 받았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이렇게 말하면 그는 섭섭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안친한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정말 나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이름과 전화번호가 고작이다.

나이도, 하는 일도,,,, 아참, 집도 안다. 찾아가라면 못 찾겠지만... 얼마전에 차를 얻어타느라 그의 집앞에 갈 일이 있었다,,,

일대일로 만나 본 일도 없고, 전화 통화는 서너달 쯤 전에 딱 한번.

술을 많이 마시고 헤어진 다음 날, 괜찮냐는... 안부전화를 한번 받았었다.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을 두 번째 만나는 자리에게 내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거다.

이름은... 당연히 모른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는 절대로 먼저 이름을 묻지 않는다.

그가 이름을 말해 준다면... 몹시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아.. 네..." 한다.

이름을 묻지 않는 건, 두서번 만난 후 그의 얼굴을 기억하게 되고, 멀리서도 그를 알아 볼 즈음이 되었을 때,

"이름을 한번도 말해주지 않았어." 라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들어 자연스레 기억할 수 있게 될 수도 있고 말이다.

 

 

평범한 문자 메시지.

그리고 걸려온 전화에서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 했을 뿐이었다.

새벽에 잠결에 받아든 전화에서 그가 갑자기 사귀자고 했다. 그러면서 주저리주저리 자기 이야기를 하더니 함께 고생할 사람, 부모님을 모셔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건 프로포즈 할 때 하는 말 아냐?"

"빙고~"

 

 

그는 10년을 만나는 동안 겨우 한번 했던 말이다.

"너랑 결혼 할거야..."

그가 그 말을 할때 믿지 않았고, 결국엔 지켜지지 않았던 말이다.

만난지 7년쯤 됐을 때 겨우 그 말을 했는데...

 

지금 이 남자는 내 기억으로는 두번, 그의 기억으로는 네 번을 봤다고 하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도 어려운 결정을,

이 사람은 쉽게 했기 때문에 빨리 말할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나는 너를 잘 모르는데...

지금 바로 대답해야 하면 No야. 그럴 수 밖에 없어.

 

처음엔 당혹스러워서, 황당해서, 그를 잘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였는데,

끊지 않고 자꾸만 다그치는 그를 두고 생각을 하다보니...

 

역시 아직 나는 누군가를 사귈 준비가 안 되어 있다.

 

그리고,

한순간에 풍덩 빠져들어 시작하는 건...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 사람들 말이 맞았다.

농담처럼 내가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오늘 길가다 만난 사람하고 한 달만에 결혼한다고 할지도 몰라" 라고 하면, 그랬다.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있지. 그렇지만 너는 아니야."

 

 

나는 아니다.

역시 나는

사랑이든 우정이든, 습관처럼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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