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엄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다.
가난한 집의 6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엄마는 형제 중 유일하게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바로 위의 큰 언니는 몸이 많이 아팠고, 줄줄이 동생들이 있었던 언니는
마치 맏딸처럼 살림도 해야 했고, 동생들도 돌봐야 했다. 친구들이 모두 학교를 가던 해에 친구 따라 학교에 갔지만
학비를 내지 않은 탓에 늘 선생님의 채근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혼자 공부를 해서 겨우 한글을 떼기는 했지만 복잡한 받침은 잘 몰랐고, 쓰는 것은 쉽지 않아서 회사를 다니면서 뭔가 서류를 써내라고 할 때마다 몹시 긴장했었다고 한다.
직장은 정년 퇴직하고, 30여 년을 병시중 하던 남편이 죽고 분명 쉼이 필요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던 엄마를 위해 나는 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과정 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처음 내가 소개해 준 곳에서 만난 친구들을 통해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초, 중, 고등 교육과정들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2년만에 졸업하고, 중등과정은 정규학교 인정을 받지 못한 곳이라서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다. 몇몇 곳을 고민하다가 지금의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코로나 때문에 수학여행, 졸업여행도 못하게 되었다.
상업계 학교다 보니 무슨 정보 수업이라고 해서 엑셀의 함수까지, 나도 모르는 기능들도 배워야했는데 엄마는 곧잘 하셨다.
공부를 하면서 엄마는 영화를 잘 보게 되었다. 가끔 극장을 가면 외국 영화는 재미가 없다고 하셔서 '그런가 보다.',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는데 공부를 하면서부터는 외국영화도 재미있다고 하셨다.
- 이제는 자막도 그냥 술술 읽을 수가 있으니까 다 알아들으니까 재밌지.
하셔셔야 겨우, 한글을 알기는 하지만 읽는 속도 때문에 외국영화 자막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차마 부끄러운 마음에 딸에게도 그 이유를 말씀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학교를 가기 전에는 잠시 성당에서 레지오 활동을 하셨는데, 우리가 힘드니 좀 쉬다가 활동 하라고 그렇게 말려도 계속하시던 활동을 어느 날부터인가 가기 싫어하셨는데, 그것도 사실은 열심히 하다 보니 자꾸만 직함을 주고, 총무를 맡으라고 하는데 글 쓰기가 어려워 기피하셨던 거였다.
매일매일 성경 필사를 하셨는데, 어느날 부터인가 이제는 연필로 안 쓰고 볼펜으로 쓰신다면서 또 같은 시간에 쓰는 양도 훨씬 많아졌다며 좋아하셨다.
재작년엔가는 친구분들과 일본 여행을 가셨는데, 어떤 분이 다이소를 가고 싶은데 어디인지 아냐고 물어봐서 알려주셨다고 한다. 그분이 거기가 다이소인지 어찌 아냐고 해서, '영어로 D, A, I, S, O라고 쓰여 있지 않냐, 저게 다이소라고 써 있는 거다.'라고 자신 있게 알려주었다며 자랑하셨다.
- 우와~ 우리 엄마 영어도 이제 잘하는 구나
- 아니 그냥 스펠만 읽는 거야
- 그래도 스펠링을 아니까 그게 D가 ㄷ(디긋)으로 소리 나는 걸 알아서 다이소라고 읽은 거잖아.
- 그런 거야? ㅎㅎㅎ
고등학교에 가서는 학교에 거의 자주 오지 않는 십 대 청소년과도 조우하셨다. 선생님이 '쟤들이 가끔 오더라도 뭐라고 하지 마세요.'하고 신신당부하셨다며, 늦게 와서 한 시간 앉아서 자다가 그냥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 엄마는 진짜 이해 안되지?
- 응. 나는 그렇게 학교 보내줬으면 해도 안 보내줘서 못 갔는데...
- 어쨌든 엄마 걔네가 한 시간만 앉아 있으려고 오는 것도 대단하니까 오면 무조건 잘해줘. 십 대 동창생도 있고 멋지다.
이제 엄마는 드디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대학을 가네, 마네 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이야기했다.
- 엄마, 대학 나와서 뭐 할 건 아니지만, 그냥 지금처럼 공부가 계속하고 싶으면 가도 돼.
- 아냐~ 이제 대학까지 가서 뭐해. 그 돈이면 다른 쓸데 있는 거 배우지.
하신다.
그래도 엄마, 조금 쉬다 보면 또 공부하고 싶을 수 있어. 그럼 또 합시다!
지난 7년간 공부하느라 애쓴 엄마, 수고 많았고,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