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정유정의 진이, 지니

약간의 거리 2021. 1. 18. 17:29

아주 오래 전 <7년의 밤>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정유정 작가를 알게되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주저없이 최고라고 꼽는 소설이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실망시키지 않는, 그렇게 정교하고 장황한 묘사를 하면서도 호흡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그녀의 신작소설을 보고 구입한 책 <진이, 지니>. 물론 그 중간에 다른 책들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아직은 <7년의 밤>의 여운을 덮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진이, 지니> 역시, 구매를 했지만 책을 선뜻 읽지 못해 가지고 있다가 회사 동료에게 빌려주었는데 1년만에 책을 반납받게 되었다. 너무 재밌는데 아무리 읽어도 몇장 안 넘어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동료는 1년에 걸쳐 그 책을 읽고 2020년 말에 반납했다.

 

나는 2021년 새해 첫 번째 책으로 <진이, 지니>를 선택했다.

처음에는 책이 읽히지가 않았다.

- 뭐지? 역시 전작을 따라갈 수 없는 건가?

하루, 이틀, 3일이 지났는데도 두 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리고 4일째가 되는 날부터 나는 책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식탁에서,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다 말고, 책상에서...

집 안에서 어디를 가든, 장소를 옮길 때에는 항상 <진이, 지니>를 들고 있었다.

 

영장류 사육사, 영장류 연구가인 진이는 '왐바 캠프'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연히 불법 포획되어 있는 보노보와 마주친다. "나는 진이야, 이진이. 나는 네 친구야." 하며 다가가 파인애플 꼬챙이를 내밀었지만 친구가 될수는 없었다. 보노보를 불법으로 포획해서 팔아 넘기는 조직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던 그녀는, 그렇게 포획된 보노보의 위험함을 알지만 구조하지 못했고,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민주는 부모의 기대에 얹혀서(?) 평생을 살다가, 결국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쫓겨나서 독거노인들에게 음식배달을 하던 중 한 노인의 죽음이 구조 신호를 무시한 자신의 탓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떠돌이 인생이 되었다.

 

살아야 한다, 는 평소의 가르침과 달리 암이라는 병을 만나서 죽음에 순응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혼란스러워진 진이는 그럼에도 살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에게는 마음을 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나 보다.

그런 진이를 딱 한번 영장류센터 먼 발치에서 본 민주는 침팬지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단박에 '다정한 그녀'라고 이름 붙인다.

진이는 동물과 교감이 잘 된다. 민주는 사람의 마음의 소리를 읽어주는 모짜르트를 가지고 있다.

 

교통사고로 지니의 몸에 갇히게 된 진이의 영혼, 그리고 그 영혼의 소리를 읽어주는 민주와의 만남의 어쩌면 그들이 갖고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통스러운 과정과 굳이 갖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 때문에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순간에 우리는 '선택'이라는 과제를 부여 받고, 그리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때로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하지만 후회에 잡아 먹히는 순간 우리 삶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후회가 발목을 끊임없이 잡아 당기지만,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고자 했던, 그렇지만 결국엔 제자리에서 맴돌 수 밖에 없었던 진이와 민주에게 다른 선택의 기회는 이렇게 지독한 삶과 죽음의 굴레로 나타났나보다.

하지만 다른 선택도 결국엔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미련을 떨궈냈을 뿐.

 

미련을 갖는 일이,

후회할 만한 일을 저지른 것이,

조금은 덜 괴로웠으면 좋겠다.

누구나 그런 기억 하나둘은 가지고 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