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7주기를 맞는 아침은 뭔가 불편하고 서먹했다.
이미 지난 주에 1박 2일로 성묘를 다녀왔고, 새벽에 연미사를 드리고, 저녁에 제사는 생략하기로 했다.
이른 새벽 냉담중인 막내와 그보다도 더 냉담해서 성당에 발길 끊은지 여러 해가 된 형부까지 대문 앞에 모여 함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다.
갈 때도 그렇고 돌아오는 길에도 다들 별 말이 없다.
둘째: 언니 오늘 몇시에 와?
큰애: 글쎄... 퇴근하면...
둘째: 퇴근하면 오는 건 당연한 거고 그러니까 시간이 어떻게 되냐고?
큰애: ... 모 일찍 나오고야 싶지만...
짧은 침묵 후에 내가 다시 말을 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크기로.
둘째: 그래도 저녁에 모여서 밥을 먹든, 차라도 마시든 해야하지 않겠어?
큰애: 빨리 끝나야 일곱시니까 여덟시까지는 올께
그렇게 밥을 먹자는 건지, 차나 마시자는 건지 알수 없는 대화가 끝나고 가족들은 다시 말도 없이 마치 순례자 행렬처럼 6명이 꼬리를 이어 걸어간다. 중간에 엄마는 집에 가서 형부 커피 한 잔 주겠다며 같이 먹이겠다고 떡집에서 절편을 산다. 우리는 그러겠다거나 그렇지 않겠다거나 아무런 말이 없이 돌아온다. 대문 앞에서 미적거리는 사람들. 엄마가 먼저 정적을 깬다.
엄마: 너네 신랑 커피 줘야지
큰애: 응. 안그래도 올라가서 한 잔 줄거야.
엄마: 우리집 들어가서 안 먹고
큰애: 응 그냥 올라갈께
둘째: 엄마, 지금 시간이 우리집에 모이면 다들 지각하는 시간이에요. 우선은 각자 헤어져요
엄마: 그럼 떡 좀 줄까?
엄마는 좀 전에 산 절편을 내미는데 언니는 고개만 살랑 젓는다.
둘째: 엄마, 형부 원래 아침에 뭐 안드시는 거 알면서. 그냥 들어갑시다. 모였다 흩어지면 지각이에요.
하나뿐이 우리아버지의 손자는 오늘 성당에서 가는 캠프를 떠난다. 엄마는 좀 자다가 가라고 하는데 녀석은 핸드폰 게임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아버지 7주기날 아침이 흘러갔다.
결재가 있어서 나는 '잠시'라는 마음으로 출근을 했는데, 오늘따가 교수님들이 머무시는 시간이 길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사무실을 나섰다. 오전에 약속한 대로 동생에게 전화를 했고, 우리는 집근처에서 만나서 프린터기를 하나 사 들고 집으로 간다.
막내: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아쉬운 거야. 그래서 엄마 괴롭혀서 저녁에 제사는 안 해도 음식 좀 장만해서 연도는 하자고 했어. 미사때 연도는 안했잖아. 그랬더니 엄마가 동태전 할 거는 벌써 사다놨다고 하더라. 엄마는 귀찮다고 하는데 내가 그래도 연도라도 해야 하니까 빨리 장보러 가자고 계속 졸랐더니, 사실은 아침에 형부가 삐친것 같았대. 그래서 엄마가 좀 마음이 쓰였었나봐. 그래서 내가 언니랑 형부한테도 모여서 기도한다고 문자보냈어. 그리고 백화점에 갔는데 사과는 벌써 사다놨다고 하고, 배는 맛 없어서 안 샀고, 포도한 송이랑 엄마가 바나나 먹고 싶다고 해서 샀어. 그리고 엄마가 돼지고기 산다고 하는데 내가 그냥 소고기 사라고 했어
둘째: 잘했어. 나도 뭐 하나 생각한 거 있는데
막내: 뭔데?
둘째: 아니 어쨌든 저녁에 모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뭐 할게 없잖아. 그래서... 우리 차라도 마시면서 돌아가면서 아빠에 대해서 각자 기억나는 이야기 하나씩 하기로 하면 어떨까?
막내: 재밌겠네
둘째: 그치? 그럼 이따가 기도하고 밥 먹고 나서 하자.
막내: 근데 엄마가 장보면서야 마음을 이야기 하는 거야
둘째: 뭔데? 제사 안해서 서운했대?
막내: 엄마는 어쨌든 우리가 딸만 있으니까 엄마도 죽고 나면 너네가 이런거 할 수나 있겠냐고 하더라고.
둘째: 다들 결혼하면 명절 차례가 힘들지도 모르지만 제사가 집집마다 다 다른날해서 날짜 겹치는 것도 아닌데 뭐.
막내: 아무튼 그래서 우리 생각해서 자기도 안한다고 했나봐
집에 도착해 보니 어쨌거나 전도 부치고 한다고 했는데 집에 부산스러움이 없다.
둘째: 전 부친다며?
엄마: 응 근데 얼마 안되니까. 언니네 오는 시간 맞춰서 하려고. 미리 해서 식힐 필요 없잖아.
둘째: 그래
그래서 잠시 땀 식히며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둘째 삼촌 가족이 들이닥친다. 휑한 집을 보고 삼촌도 좀 놀라신 눈치다. 막내는 아무것도 모르는 냥 능청을 떤다.
막내: 아니 어쩐 일로 연락도 없이 오셨소.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어쩌려고
삼촌: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해서...
막내: 오늘이 무슨 날인가...
삼촌: 오늘 형님 제사 아냐?
삼촌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말씀을 잇는다.
막내: 맞지. 근데 우리가 제사를 지낼지 안 지낼지도 모르면서 온다고 미리 연락도 없이 왔다가 아무도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수~
삼촌: 안 그래도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전화를 할까, 말까, 하면서 왔지.
둘째: 그래? 우리 없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
삼촌: 아니. 항상 이때쯤 노량진에 낙지사러 가니까 ...
둘째: 아하...ㅋㅋ 응 암튼 좀 있다가 전 부칠 거야.
가지, 호박, 동태... 엄마는 조금만 준비 한다고 했다면서 처음으로 시작한 가지전은 붙여도 붙여도 끝이 안난다. 그런데 옆에 있는 호박은 정말 조금이다. 조금 한다더니 왜 이렇게 많은가 어쩌고 하는 데 전화벨이 울린다. '누구지'하는 삼촌에게 막내와 나는 전화기는 보지도 않고도 "둘째 이모님 이시지"하고 답을 한다.
둘째: 우리집으로 전화하는 몇 안되는 이모님이시지. 우리 오늘 음식 모 하는지 감시하려고 전화하셨구만.
막내: 아니야, 엄마가 우리 제사 안지낸다고 지난번에 말 했는데
둘째: 그래도 진짜 안하겠나 싶어서 확인전화 하셨지 ㅎㅎ
막내: 감시자? 하하
둘째: 하하 우리 집에 이모님과 삼촌님 감시자가 두분 계시지 ㅎㅎ
우리는 시종일관 장난을 치며 음식을 만든다. 전 몇점과 소주 한잔을 드시면서 삼촌은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하고 머쓱하게 이야기를 하신다. 우리는 농담이에요, 농담... 재밌으라고 한 거지, 한다. 전화를 끊으면서 엄마는 "진짜 제사 안지내냐고 물어보네" 한다.
생각보다 언니네가 일찍 도착해서 우리는 부랴부랴 상을 차린다. 어차피 제사를 지낼 것은 아니라서 제대로 된 제사상은 아니지만 준비한 음식들을 이것저것 담아낸다. 다같이 짧은 연도를 마치고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며서 막내는 오늘 준비한 순서가 하나 더 있다고 예고를 한다. 친인척이라고는 하지만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연령대도 다양하고 각자 하는 일도 다루니 일상적인 인사를 나누면 그닥 함께 나눌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오늘 캠프 떠난 아버지의 유일한 손주 이야기, 삼촌네 딸을 데리고 떠나기로한 이번 휴가 준비 이야기, 삼촌의 회사 일 이야기, 막내이모네 집들이 이야기 등이 두서없이 오고간다. 식탁에 둘러 앉은 사람들은 그렇게 따로 혹은 같이 이야기에 들어외도 하고 빠져나가기도 한다.
가볍게 반주를 곁들인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둘째: 자, 오늘 우리가 모인데는 목적이 있잖아.
아무런 사전 정보 없는 언니가 엉뚱한 소리를 한다.
큰애: 이런 기회에 같이 모여서 밥이라도 먹자는 거지
둘째: 아니지, 아니지. 오늘이 무슨 날인가요?
큰애: 아버지 제사
둘째: 그렇지. 오늘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모인 거잖아. 그래서 돌아가면서 각자가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나, 아버지와 있었던 일 같은거 한 가지씩 돌아가면서 말하기 하자.
큰애: 나 기억나는 거 있는데
언니는 마치 미리 예고편을 보고는 준비해 온 사람처럼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한다.
큰애: 아빠 돌아가시 전날, 엄마는 잠깐 집에 씻고 옷 갈아입으러 가고 내가 병원에 대신 있었는데 저녁 무렵에 놀지는게 보였거든. 근데 아빠가 엄마 어디갔냐, 언제 오냐 하고 물으시는 거야. 내가 엄마 잠깐 옷 갈아 입으러 집에 가셨다고 하니까 또 금방 엄마는 왜 이렇게 안오냐, 하셔서 내가 '엄마 간지 얼마 안 됐어요. 금방 오실 거에요.' 하고 나면 또 잠깐 있다가 '엄마 어디갔냐? 왜 이렇게 안오냐?' 그래서 '엄마 집에 가서 옷만 갈아 입고 온다고 하셨어요. 가시니 얼마 안됐어요.' 했거든.
말을 하면서 언니는 울먹거리지는 않았지만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고 잠깐씩 말을 멈추고 코를 실룩했다.
엄마: 그때 나한테 전화도 했었잖아.
둘째: 맞아, 그래서 그때 엄마가 그냥 있을 걸 괜히 왔다고 후회하면서 서둘러 갔지.
큰애: 그때 아빠는 어쩌면 그런 느낌이 있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아무튼 그래서 나는 놀을 보면 아빠 생각이 나기도 하고...
모두가 잠시 숙연해지려는 찰나, 나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 시킨다.
둘째: 그랬군요. 자, 그럼 이제 누가 이야기 하시겠어요
좌중을 둘러본다.
숙모: 나는 모... 야단 맞은 기억밖에 없어요.
막내: 외숙모 우리 아빠한테 혼났다고요?
둘째: 왜요?
숙모: 아니..뭐 할머니 안모시고 쫓아냈다고 그러고... 할머니 큰집으로 보냈다고..
둘째: 그거야 뭐 삼촌도 새로 장가가고 했으니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신혼집에 계실게 아니라 큰아들한테 가신 거죠
큰애: 새로라니?
둘째: 아, 그런가요? 저의 '새로'는 그 새로가 아니라... 아무튼 적절치 못한 부사의 사용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두가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삼촌이 바톤을 이었다.
삼촌: 큰애 너는 진짜 안 가본데가 없어. 형님이 어디를 가도 너를 안고 갔지. 친구들하고 고깃집가서 술을 마셔도 그렇고, 그런데 너는 또 울지도 않고 잘 놀았어. 좋아서 그랬는지, 어땠는지
큰애: 나는 통금통행권용이었어
삼촌: 너네 아빠가 사람 좋아하고 그런데 배신을 당해서... 그래서 어려워졌지. 너는 맨날 안고 다니고 그랬는데 셋째는 운다고 화내고 했지
둘째: 그건 나지
그때 엄마가 불쑥 끼어든다.
엄마: 그래 그건 둘째지.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따라 일어나던 애가 그날 따라 안 일어나서 애가 탔는데...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고 콩나물 사러 혼자 갔다 왔지. 정신 없이 뛰어 갔다가 뛰어 오는데 골목에 너네 매부가 얘를 안고 나와서서 왜 아침부터 시끄럽게 애를 울리고 놓고 가냐고 소리지르고 있는거야.
둘째: 그래서 내가 콩나물을 싫어하는 구나.
엄마: 그래서 ~~
둘째: 엄마, 근데 지금 삼촌 이야기 하는 타임인데 이렇게 순서를 가로채면 곤란하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삼촌 이야기에 이어서 본인은 이걸로 하나 이야기한 걸로 끝내시겠어요? 그럼 계속 이야기하시고, 아니면 삼촌 이야기하게 엄마는 순서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엄마: 나는 뭐 말할 것도 없어.
둘째: 이거봐, 이거. 이렇게 새치기하고... 자, 그럼 삼촌 이야기 마저 하시겠습니다.
삼촌: 나 할 이야기 없어.
둘째: 이것 봐, 삼촌 삐졌잖아.
삼촌: 아니 삐진게 아니라... 나는 뭐.. 할 이야기 없어.
엄마는 삼촌의 딸에게 고모부가 기억나는지 묻는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언제나 목소리가 너무 작은 사촌동생이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답을 한다. 고개짓이 없었다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의사표현이다.
둘째: 기억 안난다고?
숙모: 제일 예뻐했지.
둘째: 네가 몇살이지?
사촌: 15살
둘째: 오잉? 15살. 그럼 그때가 8살인데 왜 기억이 안나?
형부: 15살이야? 그럼 다 컸네
친척들 모이면 언제나 아이들의 나이는 새로운 법. 좌중이 우왕좌왕 소란스러운 차에 엄마는 사진 보여주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방으로 들어가신다.
둘째: 나는 우선, 전에 아빠가 나만 포장마차에서 대하구이 사 주신 적 있거든. 왜 퇴근할 때면 가끔씩 나한테 전화해서 같이 술 먹자고 하셨잖아. 그래서 갔는데 그때 대하구이를 시켜주신 거야. 사실 대하는 아니었어. 완전 쬐그만 새우였는데 아무튼 아빠는 안 드셔서 드시라고 했더니 나는 맨날 늦게 와서 못 먹은 거고 다른 식구들만 며칠 전에 집에서 대하구이를 먹었다는 거야. 그래서 미안해서 나만 따로 불러서 사 주시는 거라는 거야. 나는 그런 줄 알고 먹었는데...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엄마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가 집에서 나빼고 식구들끼리 먹은 적 없대. 나만 사주신 건가봐.
막내: 우리 모두 이제 기억이 가물 거려서... 집에서 먹은 적 있기는 한대..
둘째: 그래 한번은 나도 집에서 먹은 기억 있어.
막내: 암튼 혼자만 먹은 걸로 치고..
그리고 나는 엊그제 발견한 9년전의 다이어리 이야기를 했다. 언제나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가 매일 늦게 오는 딸한테 일찍 오라는 야단을 못 치시고는 더운데 샤워하게 자고 일찍 들어오라고, 그래야 시원하지 했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11시 알람이었던 아버지와 아버지가 떠난 뒤 아무도 연락이 없어서 쓸쓸했고, 어느날부터인가 조카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고. 어쩌면 그래서 그 아이가 더 사랑스러웠을 거라고. 삼촌이 맞장구를 쳤다. 사람들은 그렇게 같은 걸 반복하면 기억이 더 많이 나는 거라고.
막내: 나는 별로 생각나는 게 없어. 아까 언니한테 얘기 듣고부터 생각을 해 봤는데 말할게 별로 없더라구. 근데 나는 요리를 아빠한테 배운 것 같아. 라면이랑 국수도 아빠가 두번 끓으면, 그러니까 후루룩, 후루룩 하고 두번 끓어오르면 불을 끄면 된다고 했거든
후루룩이라고 말할 때 막내는 손가락을 아래로 하고는 손을 회오리처럼 끌어올린다.
둘째: 그래, 아빠도 고들고들한 라면을 좋아하셨지?
막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막내: 그리고 닭도리탕도 아빠가 씻어와라 하면 내가 씻어가고 그러면 이걸 이렇게 해라 하면 하고
둘째: 닭도 했어?
막내: 응. 도넛츠도 하고
큰애: 맞아 그 팬에다가 기름 넣고
둘째: 난 도넛밖에 생각 안나느데
막내: 아무튼 그래서 나도 회사에서 입으로 시키는 건 완전 잘 하지.
그리고 우리는 부산에 있는 셋째에게도 전화를 하기로 했다.
둘째: 셋째한테도 전화하자.
엄마: 걔 병원에 있어서 안돼.
둘째: 그런게 어딨어? 그러니까 해. 병수발 못 들게 자꾸만 전화해서 귀찮게 하자. 귀찮으면 집에 보내주겠지.
삼촌: 왜 병원에 있어?
엄마: 시어머니가 어제 아프다고 해서 입원했대
그러는 사이 막내가 셋째에서 전화를 했다. 스피커 폰을 켜 놓고 통화를 시작했다.
둘째: 안녕! 잘 지내?
셋째: 응 언니.. 잠시만..
부시럭 부시럭하며 움직이는 소리가 나고 전화기가 조금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막내: 밖을 나오는가보다.
둘째: 응 응
셋째: 제사는 잘 지냈어?
둘째: 응 우리 지금 연도하고 밥 먹고 나서 아빠에 대해서 기억나는 이야기 하나씩 돌아가면서 하고 있어. 이제 네 순서야. 그러니까 너도 뭐 생각나는 이야기 아무거나 하나 해봐
셋째: 나는 그때 애니메이션 할 때였는데....
술술 나오는 이야기들이 어쩌면 우리 모두 이런 시간이 있기를 기다렸나보다.
돈도 못 받으면서 매일 밤새고 그러면서도 일본에 기한 맞춰서 보내야하고 하니까 진짜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그날도 나는 한숨만 자고 일어나서 그림을 그려야했는데 너무 오래 잤던거라. 그래서 저녁이 돼서 일어나서는 허둥지둥 나가는데 아빠가 가지 말라고 하면서 밥도 안먹고 씻지도 않고 어딜 가냐고 하는 거야. 다 내가 걱정돼서 말한 거였는데 내가 그때 뭐에 홀린 건지 막 소리를 지르면서 왜 내가 하고 싶은거 못하게 하냐면서 아빠가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다고 다른 사람들은 원피스도 사주고 금반지도 사주고 하면서 나한테는 아무것도 해 준것도 없으면서 왜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냐고 막 소리를 지른 거야. 그랬더니 아빠도 화나고 흥분을 해서 주먹을 쥐고 내 얼굴을 치는데 완전 사람이 몸이 붕 날았거든.
둘째: 그래.. 그래서 그때 아빠가 휠체어에서 떨어졌지.
셋째: 그래.. 근데 그 주먹에 눈있는데가 정통으로 맞아서 안경이 날아갔어.
큰애: 헉~ 진짜?
셋째: 그래서 내가 화나서 주먹을 꼭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를 막 쳤지.
둘째: 그래, 네가 화나면 나오는 모습이지.
전화로 들리는 이야기라서 우리는 셋째가 말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때로는 우리끼리 소곤소곤 눈짓과 표정으로 동의를 구하거나 해 가면서 아주 가끔은 셋째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어주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셋째: 그랬더니 엄마가 아빠 편을 들면서 나가라고, 다시는 들어오지도 말라면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나는 너무 서운하기도하고 화가 나서 알겠다면서 다시는 안 온다면서 회사에 갔다. 근데 그때가 완전 겨울은 아닌데 추울 때여서 난방도 안 들어오고, 돈도 없어서 사발면 겨우 사먹으면서 며칠을 지내는데 너무 추운 거야. 그래서 어떨때는 지하철 타고 뱅뱅 돌면서 거기서 자고, 완전 노숙자같이 그랬다니깐. 그러면서 있었는데 며칠 있다가 큰 언니가 찾아와서는 집에 오라고 하는 거야. 내가 안 들어간다고 했는데 언니가 아빠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다면서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일단 집에 가자고... 사실 그때 나는 진짜 집에 가고는 싶었지.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는데 아무튼 언니가 나 달래면서 그때 커피숍에서 둘이 끌어안고 울었다니깐. 그리고 집에 왔는데 아빠가 야단을 칠줄 알았는데 나를 안아주면서 우시는 거야. 그래서 잘못했다고 하고 저쪽 골방에 엄마한테 갔는데 엄마는 너무 냉정하고 차갑게 나가라면서 니가 누군데 우리집에 왔냐는 거냐.
둘째: 그래, 우리 엄마는 좀 냉정하지.
셋째: 그러니까.. 아빠도 안 그랬는데 그래서 내가 놀라서 막 울면서 잘못했다고 매달렸어
둘째: 그래? 그랬어? 그때 나는 집에 없었고, 전해만 들었는데... 내 기억에는 네가 그날 밤에 들어왔는데... 그래서 내가 속으로 집을 나갔으면 도서관에서도 가서 하룻밤을 자고 와야지 돈 없다고 그냥 오면 어쩌냐. 그랬는데.
셋째: 아니야 며칠 안 들어왔어?
둘째: 그래? 그럼 가출이 한번이 아니라는 이야기군. 상습적이네.
엄마는 한참만에 헤진 앨범을 하나 들고 나오면서 '이상하게 사진이 없네'하신다.
그렇게 우리의 아버지 7주기 모임이 끝이 났다.
다 끝내고 정리까지 마치고 나서 보니 형부이야기는 듣지도 못해고, 청해보지도 못했다.
내년에는 꼭 형부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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