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날씨

연애의기술1 선명하게 그러나 아련하게

약간의 거리 2009. 11. 10. 13:41

연애의 기술 1. 선명하게 그러나 아련하게

 

사랑이 한 순간에 풍덩 빠지는 건 줄 알았어.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건지 몰랐어.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매일 티격태격 싸우던 철수와 사랑에 빠진 걸 알게 된 춘희는 그렇게 혼잣말을 한다. 춘희는 오랫동안 짝사랑 해온 남자가 있다. 그 남자가 춘희라는 존재를 아는지 어쩌는지도 모르지만 그 남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주변을 얼쩡거린다. 후루룩 쩝쩝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고, 함께 마시는 물을 거침없이 병째 들고 마셔버리는 춘희가 철수는 지저분하고 못마땅해 언제나 잔소리를 한다.

미술관을 좋아하는 춘희와 동물원을 좋아하는 철수. 그렇게 서로 달라서 절대로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을 것 같던 춘희와 철수는 티격태격 싸우는 동안 어느새 사랑하게 된다.

 

중요한 건 사랑이 서서히 물들어 가는 거라는 걸 깨달은 사람은 춘희라는 것이다.

 

흔히들 연애는 밀고 당기기 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두 남녀가 사로가 사랑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시작하는 연애라면 왜 굳이 밀고 당기며 힘을 빼야하는가.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시작하는 어떤 사람도 더 많이 사랑하는 약자가 되기 싫어 덜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밀고 당기기가 연애의 정석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같은 회사에 맘에 드는 여자가 있던 남자는 부러 여자와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회식을 하면 같은 방향이라는 이유로 여자를 집에 데려다 줬다. 날씨가 이제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하는 늦은 봄날에 남자는 여자에게 부채를 선물로 줬다. 부채 끝에는 작은 고양이 펜던트를 달아주었다. 그것은 여자가 고양이를 몹시 키우고 싶어 했는데 부모님이 반대해서 키우지 못했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여자도 충분히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몇 번의 저녁 식사 데이트를 여자는 거절했다. 부채까지 선물로 받았으면서 대체 왜 그러는지 남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확실하게 마음을 보여주기로 한 남자는 여자의 사무실로 커다란 꽃바구니를 배달시켰다. 그날은 마침 동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고, 돌아오는 길 남자는 여느 때처럼 여자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마침 함께 가겠다고 하는 다른 녀석이 있었지만 자기가 바래다주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해서 돌려보냈다.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자는 남자에게 여자는 할 이야기가 있으면 그냥 집 앞에서 하자고 했다. 단지 안에 공원이 있잖아요. 그리고 여자는 저한테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사내에게 누굴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여자들이 감동을 받는다는 꽃바구니까지 배달을 했겠다, 의기양양해 있던 남자는 여자의 말에 당황했다. 우선 여자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 부채를 받고서도 모른다는 것인가. 그 부채에 달린 고양이 펜던트를 보고서도 어떻게 모른다고 말할 수가 있지. 그럼 그 동안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집에 바래다주었는데 사내연애는 싫다니. 남자는 그 동안 자기가 여자에게 공들인 일들을 열심히 설명하면서 그래왔는데 내 마음을 진정코 몰랐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군요.’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누구나 로맨틱한 사랑을 꿈꾼다. 로맨틱하다는 것은 안소니가 캔디를 위해 가꾸던 장미농장 같기도 하며, 수만 송이도 안개꽃과도 같고-물론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춘천호에서 만나는 이른 새벽의 물안개 같기도 하며, 고양이털처럼 보드랍기도, 솜사탕처럼 달콤한 느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라이자와 그의 오빠가 와서 언제든 꺾어가 버릴 수 있으며, 금세 시들어 버리고, 햇볕이 비추면 사그라지며, 어느새 녹아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만큼 가냘픈 것이어서 풍덩 뛰어들었다가는 여지없이 단단한 바닥에 부딪히고 만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분명하게 눈앞에 보이는 실체이면서 끊임없는 관심과 손질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정성을 들이면 들일수록 그것은 조금씩 탐스러워지며, 아름다워지며, 깊어진다.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니까 세계 꽃박람회가 도시마다 열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무슨 무슨 꽃 축제가 열리면 언제나 사람이 바글바글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좋아하며 그것을 즐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누구네 집 담벼락에 핀 무수히 많은 장미꽃이 아니라, 누군가 바람막이를 만들어 씌어주는 단 한 송이의 꽃이 되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신경 써서 부러 같은 단지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는지 여자는 알지 못했다. 집 방향이 같아서 회식이 끝난 자리에서 집에 태워다 주는 것은 친절하고 고마운 일이다. 작은 선물까지 주는 것으로 보아 남자가 여자를 좋게 생각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 남자인 것이다. 어느 날 꽃바구니가 배달되어 왔다. 동료들은 난리가 났다. 누가 보낸 거예요? 남자 친구가 있었단 말이에요? 여자는 당황스럽다. 자기에게 꽃을 보내올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카드를 열어보니 남자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녁 동기모임이 끝나고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굳이 다른 사람과 차를 타겠다고 하면 이상해 보일 것이고, 그렇다고 같은 차를 타고 둘만 집에 가는 건 불편하다. 마침 다른 녀석이 술김에 바래다주겠다고 나섰는데 저 남자가 막아선다. 정말 오해 살만한 상황이다. 나랑 자기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남자가 여자를 좋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다. 물론 여자는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좋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자는 확실하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사랑을 한 번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았던 남자. 자신은 사랑에 풍덩 뛰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에게는 그저 누구네 집 정원의 아름다운 꽃과 같았던. ‘참 예쁘네!' 하는 여자의 독백이 자신에게 향한 것인 줄 착각했던 것이다.

 

사랑을 하면 친절하게 되고 배려하게 되고 지대한 관심을 쏟게 된다. 하지만 친절이나 배려나 관심이 곧 사랑은 아닌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우리는 보다 선명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마치 미술관을 좋아하는 춘희가 동물원으로, 동물원을 좋아하는 철수가 미술관으로 향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 사랑의 표현은 울타리를 치듯이 반듯하고 뚜렷해서는 곤란하다. 사랑의 로맨스는 언제나 한 아름의 안개꽃처럼 아른거려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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