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어차피 버릴거면서

약간의 거리 2009. 8. 12. 09:39

유효기간이 지난 우유를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사람이 있다. -그냥 버려. 하고 말리는 내 말에 암시렁도 않게 -이틀정도는 괜찮아. 냉장고 있었잖아. 하면서 말이다.

나는 꺼내든 우유의 날짜를 확인하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냉장고에 넣는다. 이틀, 혹은 사나흘이 더 지난 후에야 우유팩을 연다. 냄새를 맡는다. 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먹기에는 유효기간이 너무 많이 지났다. 그제서야 팩을 열고 싱크대에 그것을 따라 버린다.

-아깝다.. 하고 낮게 읊조리면서.

 

내 잘못은 결국 버리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 바로 버리지 못하고 며칠을 더 갖고 있는 미련뿐이 아니다. 미련은 그것을 살 때 내가 너무 많이 생각하고 골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딸기우유, 바나나우유, 쵸코우유, 커피우유, 아니 그냥 흰우유를 먹을까? 그래, 다른 건 너무 달겠지? 그치만 흰 우유는 너무 밋밋하잖아. 어? 저건 뭐지? 포장이 너무 예쁘다. 먹고 싶은데... 아니야, 그 브랜드는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건데... 그래도 포장을 넘 이쁘게 바꿨는걸. 아, 이건 새로 나왔나보다. 이름이 넘 특이하네.

그렇게 집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진열대의 이쪽에서 저쪽을 열번도 더 넘게 오가면서 신중한 듯 그것을 고를 때 나는 결코 유효기간을 보지 않는다.

 

-언니는 우유를 살때 유효기간을 안 보더라~

-아닌데.... 나 원래 잘 보는데...

사실 너무 많은 걸 고려하다 보니 마지막에 그 물건을 집어 들었을 때 유효기간을 확인하는 건 언제나 까먹는다. 그리고 냉장고에 들어간 우유는 다시 기억속에서 잠깐동안 잊혀지고, 어느날 그것을 찾았을 때는 이미 날짜가 지나있기 쉽상이다.

 

우유뿐이 아니다. 야채나 과일도 그렇다. 정말이지 그것을 살 때는 얼마나 열심히 살피고 또 살피는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싱싱해 보이는 거, 맛있어 보이는 거. 양상추를 살 때면 무게가 무거운게 좋은 거라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어서 양손을 저울 삼아 마트에 있는 양상추 전부를 들었다놨다 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것들을 냉장고에 넣는 순간 잊어버리고, 다시 그것을 발견하면 -아, 내가 이걸 샀었구나! 먹어야 하는데.. 하고는 다시 또 몇날이 지나가고 어느새 시들해 진 모습에 운이 좋으면 엄마가 쥬스를 만들어 준다거나, 시든 부분을 손질해내고 아직 먹을만한 부분을 건져주지만. 그런 행운이 없을 땐 결국 -아, 사오자마자 먹을껄! 하면서 버리게 된다.

 

결국엔 버려질 것을 괜히 냉장고안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사랑도 그렇다.

그게 끝난 걸 알면서도 바로 돌아서지 못한다. 아직 겉보기엔 멀쩡하니까.

 

잘 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날짜를 확인하는 순간

미련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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