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날씨

그만 헤어지자자고

약간의 거리 2008. 8. 14. 17:20

 

남자는 그때 몹시 피곤했다.

경쟁사와 업적 경쟁이 붙은터라 연일 행사가 끊이질 않아서 행정업무며 행사진행으로 연일 계속 야근이다. 게다가 짬짬이 지쳐가는 직원들 사기를 돋운다며 회식까지 잦아진 참이다.

여자는 바쁘다며 매일 회식가는 남자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바쁜데 회식할 시간이 어디 있으며, 가끔 짬이나면 일찍가서 쉬어야지 어떻게 회식을 할 수 있느냐는 거다.

남자도 때로는 피곤하지만 회사 일이라는게 아무리 늦어져도 회식을 하면서 풀리는 일이 있는 법이다. 게다가 회사 근처에서 자취는 하는 남자는 어떤 핑계로도 회식 중간에 빠져나온다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처럼의 휴일.

내내 맘이 상해서 잔소리가 심해진 여자의 맘을 풀어주려 나들이를 계획했는데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아침 일찍 교외로 나가기로 했는데 비가 와서 어차피 일정에는 수정이 필요하다. 갑자기 남자는 늦잠이 자고 싶어졌다. 여자에게 전화가 오면 좀 늦게 움직이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아직 잠이 덜깨어 멍한 상태에서 문을 여는 남자는 그때 솔직히 좀 짜증스러웠다. 여자는 처음의 약속대로 시간맞춰 도착한 것 뿐인데, 그래도 비가 오니 미리 연락이라도 줄거라던 생각이 엊나갔기 때문이다.

"어차피 비 오니까 좀 있다가 움직일까?" 아직 나갈 준비를 하지 않은 남자에게 여자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남자는 모른 척 했다. '그럴거면 미리 전화를 하고 늦게 나타났어야지.'

 

결국 언제나 그렇듯 영화나 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남자가 회사 근처로 이사를 오기 전에 자주 가던 극장까지 나가기로 했다. 나들이가 깨졌지만 시내까지 긴 시간 차를 타고 나간다는 것에 여자는 살짝 들떠 보인다. 남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말이 퉁퉁거린다. "너무 피곤해? 기분이 안 좋아?" 하고 물으면서도 여자는 좀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들떠서인지 약간은 톤이 올라간 여자의 목소리조차 남자는 얹짢은 터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남자는 아침에 미처 자지 못한 잠에 대한 미련이 쉬이 떨쳐지지 않는다. 얼른 들어가서 남은 휴일을 충분히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집까지 가려면 너무 멀다. 아침에는 어찌되었든 모처럼 여자의 기분을 풀어주겠다는 생각에 덜컥 이곳까지 가자고 했는데

여자가 걱정스레 "너무 멀지 않아?" 하고 물었을때 슬쩍 집 근처로 바꿀 걸 후회가 됐다.

"이제 모 하지?" "집에 가자." "벌써?" "할것도 없잖아" "하지만 오늘은 나랑 하루 종일 놀아주기로 했잖아. 겨우 4시밖에 안됐단 말야" "그건 나들이할 때 얘기지. 비와서 어디 갈 수도 없잖아?" "그럼 우리 박물관 갈까?" 시큰둥한 남자의 반응에 금새 여자는 풀이 죽는다. "그래. 그럼 가자. 대신에 내가 바래다 줄께" "됐어" "왜? 난 안 피곤하단 말야" "그럼 내가 불편해. 그냥 가." "여기서 헤어지자고?"

 

남자는 이제 말을 하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모처럼 여자의 기분을 풀어주겠다던 당초의 생각은 아예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다. 여자는 언제나 이런식으로 투정을 부린다는 생각이 들면서 대꾸조차 하기 싫어졌다. 결국 휙~ 돌아서 가버리던 여자가 저 앞에서 주저앉아 울어버린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비오는 거리에 주저앉아 우는 여자를 쳐다본다. '이게 무슨 짓이람' 쫓아와 주길 바란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남자는 그저 어서 집에 가서 자고 싶은 마음 뿐이다. 문득 남자는 여자가 먼저 그만 헤어지자고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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