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한 번을 신어도 십년을 신은 듯한

약간의 거리 2002. 1. 5. 00:14

제가 좋아하는 책 [어린왕자]를 보면요,
여우와 어린왕자가 서로 관계를 맺어가는 장면이 나와요.

관계를 맺으려면 참을성이 필요해서 한꺼번에 아주 가까와질수는 없어요.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매일 같은 시간에 오라고 하죠.
만일 매일 4시에 어린왕자가 자신을 찾아와 주면
3시부터 안절부절하며 행복해 질거라구요.
그리고 매일 조금씩 가까이 다가 앉아도 좋다고 해요.

관계를 맺고 길들여지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서로를 떠올릴 수 있게 돼죠.
여우가 밀밭을 보며 금발의 어린왕자를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이게 관계가 지속될때는 행복인데,

참 이상하죠?
이렇게 길들여진 관계라는 게 영원히 이어지기는 힘든 건지,
아무튼 떠나는 시간이 오잖아요.

길들여 놓고 떠나버리면 그때부터 밀밭은 슬픔이 되는 거죠.


아, 이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관계를 맺는 것 말이에요.

여우와 어린왕자처럼 오랜시간 뜸들이며 가까와지기도 하지만
한눈에 결정되어 버리기도 하잖아요.

저는 그렇거든요.

저는 사람을 사귀는 게 꼭 신발을 사는 것 같아요.
신발 가게에 가서 맘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고 신발을 신어 보죠.
사이즈가 잘 맞는데도
뒷굼치가 아프거나, 혹은 볼이 너무 눌린다거나, 이상하게 잘 벗겨진다거나 하는 신발이 있어요.
대체로 이럴때 신발가게 아저씨들은 새신이어서 그렇다면서 가죽을 부드럽게 해 줄 수 있다고 해요.
그리고는 잠깐 손을 봐서 주는데
그러면 발이 한결 편안해 져요.
대부분은 그냥 나오지만 가끔은 아저씨의 성의가 괘씸해서 사버릴때가 있는데
이런 신발은 몇번 신고는 신발장 깊숙히 처박히고 말죠.
엄마의 온갖 구박에도 끄덕없이 말이에요.

아저씨가 손을 봐준 시간만큼만 제 발에서 편안하거든요.

그치만 신는 순간 아주 오래도록 제 발에 신겨져 있었던 듯 편한 신발이 있어요.
물론 이런 신발을 만난다는 건 아주 드물고도 힘든 일이지만요.


사람도 그래요.
처음 봐서 아닌 사람은
두번을 봐도 세번을 봐도, 열번을 봐도 정이 안가는데
그냥 한 눈에 친근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어요.
물론 속내를 털어놓고 마음깊은 이야기를 나눌만큼의 사이가 되려면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가끔 뽀드득 윤기나면서 발이 편한 새신을 신고 싶을 때가 있는데
요즘이 그래요.
발에 맞는 편안한 신발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그런가?
그저 눈인사만 나누던 주변 사람들과 쓸데없는 수다가 많아졌어요.
돌아나오는 뒤통수가 늘 허무한 걸 알면서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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