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이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건 시간에 비례한다고들
말하더라.
속을 다 알 것 같은 사람도,
허물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가까운
이도,
결국엔 그게 다 "시간"이 만들어 준 거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아냐, 그렇지 않아!"라고,
그 어떤 사람한테 반대의 목소리를 낸 적은
없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시간이 관계의 깊이를 만들어준다고는 생각지 않아.
나는 말이지.
사람을 정성스럽게 만나본 적이 거의 없어.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은 가급적 막는다!
그게 내 생활 방식이었으니까...
그런데 너는 어쩌면 그렇게 막을 새도 없이 가까와져 버린 거야?
사람이 이렇게 쉽게도 친해질 수
있구나!
매 순간 그렇게 감탄하면서 지냈어.
네가 한 순간에 너무 냉담해져 버렸을 때, 오는 사람 잘 막지 못한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기나 해?
나는 사람과 사람이 친하다는 게...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때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어디에 사는지?
가족관계는 어찌 되는지?
뭘 하는지?
차가 있는지 없는지?
뭘
좋아하는지?
하는 것들.
고등학교때 매일 같이 붙어다니던 친구가 있었어.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집 방향도 비슷했고, .. 아무튼 늘 같이 다녔는데
어느날 그 친구가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이 왔고,
지난해에는 나의 담임이자, 지금은 그 아이의 담임인 선생님과 함께 병원을 가게 됐지.
병실에서 나온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어.
- 아버지 직업이 뭐니?
- 집안 형편이 어렵니?
- 어머니도 일 하시니?
- 언니도 우리학교 졸업생인데, 동생은 몇 명이니?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어.
선생님은 알고 있는, 그 아이의 언니가 우리 학교 졸업생이었다는 것은 커녕, 언니가 있는 것도 알지 못했었거든.
몰라요... 라는 말만 하던 나에게 선생님이 마지막에 그렇게 말씀하셨지
- 너 친한 친구 맞니? 왜 붙어 다니는 거니?
나는 정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 지금이라면 그렇게 쉽게 주저앉지 않았겠지만, 그때는 그랬어. 정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내가 친구처럼 느껴지지 않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이랑 나랑은 비슷했던 거야.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았지.
그 아이는 많은 걸 내게 물었고, 난 원래 묻지 않는 성격이었던 거야.
그런데도 나는 많은 걸 이야기 했는데 그 애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왔다고 생각해 버렸어. 그때부터 그 친구를 멀리하게 됐지.
그런거 있잖아.
나만 속을 보여주는게 억울한 거.
지금도 나는 여전히 상대에게 뭔가 묻지 않아.
그냥 보여주는 것만 보고, 말해주는 것만 들어.
그렇다고 아는게 하나도 없는 건 아니야.
그때도 나는,
그 친구가 어떤 선생님을 좋아하는지,
무슨 스포츠를 좋아하고, 어떤 운동 선수를 좋아하고,
걷는 것을 좋아하고,
안암동에 있던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이라는 커피숍을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너는 "왜?"냐고 묻지 않는 사람이야.
나는 항상 "왜?"라는 말을 달고 사는데 말이지.
너는 "내가 전화해 줘서 고맙지?" 하고는 능청을 잘 떠는 사람이야.
너는 올때 내가 막을 수 없었듯이, 갈 때 그냥 보낼 수 없는 사람이야.
왜냐면,
네가 냉정하게 돌아섰을 때 내가 받은 상처보다 네가 안고 있는 상처가 더 크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너는 늘 그래왔을 거야.
누군가 손을 내밀면 칼날처럼 차가운 것을 날려서 툭! 하고 끊어버려 상처입히고, 결국 욕하면서 떠나가게 만들고
그리고 나면 마치 극장 지하에서 누군가 날 사랑해 주길 기다리던 오페라의 유령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처를 혼자서 끌어 안고 있어 온 거지.
나는 너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어.
나는 너에 대해서 잘 몰라.
나는 너를 안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어.
나는 네가 약속을 잘 까먹고,
일찍 잠들고,
잠들면 전화도 받지 않고,
하루에도 몇번씩 전화를 걸다가도,
상대가 거는 전화는 거의 받지 않고,
부재중 전화에 답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가는 금새 싫증내고,
'나 이거 하고 싶어' 했을 때 튀어나와 줄 친구를 기다린 다는 걸 알아.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어떤 이와 1년이고, 5년이고, 10년이고... 연락이 뚝~ 끊겼다가는 마치 어제도 만난 사람처럼 다시 전화할 수는 있지만,
어제 만난 사람과 갑자기 모르는 사람처럼 지낼 수는 없어.
그러기엔 난 너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많거든.
네 마음이 살살 녹아 내리고 있어서 나는 정말 기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