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부고기사

약간의 거리 2021. 1. 26. 15:59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보면

엄청나게 성공한(?) 주인공 해리엇은 외롭고 부유하고 까칠한 독설가이다.

그녀의 말에 상처 받아서 저주하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그래서 노년의 그녀 곁에는 일상을 나눌 사람이 없다.

어느 날 그녀는 신문의 부고 기사를 읽다가

신문사의 부고 담당을 찾아간다. 자신의 부고 기사를 미리 쓰기 위해서.

 

사실, 해리엇의 아야기를 가지고도 글을 한 번 쓰고 싶었는데.. 오늘의 포인트는 그게 아니다.


오늘의 포인트는 <부고기사>라는 것이다.

 

최근에 하고 있는 드라마에서 부고기사가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드라마 <허쉬>에서 인턴기자가 죽기 전 남긴 글을 인용한 NO pain NO gain 이 바로 그것이다. 그녀의 이 한 줄은 오늘날의 많은 비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아니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많은 직장인들에게 울림이 되었고, 쓸쓸하기만 했던 그녀의 장례식장을 꽉 채워주었다.

 

최근에 항상 멋지다고 생각하는 어떤 분의 부고기사와 관련한 글을 읽었다. 뉴스사이트 <비마이너>라는 곳에 올라오는 [부고訃告] 난을 보고 쓴 글이었다. 이 곳에는 매일 무연고자의 장례 공지가 뜨는데

 

- 아무개님은 1963년생으로 서울시 중랑구에 사시다 지난 2020년 9월 26일 거주하시던 곳에서 사망하신 채 발견되셨습니다. 사인은 미상입니다.

 

- 아무개(남)님은 1955년생으로 서울시 중구에 사시다 지난 2020년 12월 28일 거주하시던 곳에서 사망하신 채 발견되셨습니다. 사인은 불명입니다.

- 아무개(남) 님은 1970년생으로 서울시 구로구에 사시다 지난 2020년 12월 21일 은평구의 한 건물 지하에서 스스로 안타까운 선택을 하셨습니다. 사인은 의사입니다.

 

흔히 써 놓는 고인의 약력이라는 것도 고인이 어떻게 살아오셨나를 소개할 수 없으니, 살아온 곳과 돌아가실 때의 상황을 쓰는 것으로 끝난다. 어떤 분은 사망지가 '사시던 곳'이고, 어떤 분은 '마지막 사시던 곳'이고, 어떤 분은 '주민센터'가 주소지로 라고 쓰여 있기도 하다. 그분들의 막막함과 좌절을 그저 착잡하게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영화 <내가 죽기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에서 해리엇은 완벽한 사망기사를 위한 4가지 조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 나선다. 그 네 가지는

① 고인은 동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하고,
②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며,
③ 누군가에게 우연히 영향을 끼쳐야 하고,
④ 자신만의 와일드 카드가 있어야 한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신문에서 읽은 부고 기사들을 분석했을 것이고, 그리고 이렇게 네가지 사연이 들어있는 부고 기사를 읽었을 때 고인의 삶이 훌륭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물론 영화니까, 영화에서는 어쩌면 부고기사에 실린만한 스토리를 찾아다니는 동안에 이 네 가지가 이뤄진다. 사실 우리가 발견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저 사시던 곳에서 사인 불명으로 돌아가신 분이든, 연고지도 없이 스스로 안타까운 선택을 하신 분이든, 그분들도 모두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고, 가족의 사랑을 받을 것이고, 살면서 어떤 누구든 그분에게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가끔 어떤 활동에 참여할 때 <유언장쓰기> 같은 걸 할 때가 있다.

처음에는 다들 어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하지만 어느샌가 훌쩍훌쩍 울음을 울고 있다.

- 사실 나는 이런 눈물 짜내는 활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어쨌든, 사람들은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왜 울까?

내가 죽었다는 게 슬퍼서?

아마도 아니겠지.

 

어쩌면 그 유언장은 살아서 내가 작성하는 <나의 부고기사>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쓰는 나의 부고기사에는 내가 사랑한 사람이 누구이며, 마지막 순간에 기억하고 싶은 사람, 그 순간에 꼭 하고 싶은 말, 살아 있을 때 주지 못한 안타까운 것들이 담길 것 같다.

 

남이 써 주는 부고기사에서 내가 아름답게 기억되길 바랄 때나, 내가 쓰는 나의 부고기사에서의 아쉬움을 기억한다면 결국엔 남들에게 지금보다는 조금 더 친절하게 살게 될 것 같다.

 



출처 : 비마이너(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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