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세 번째 나는 이 철문 앞에 서 있습니다.
벨을 누르면 잠시 후에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가 말합니다.
'위 손잡이 돌리고 들어가세요'
그렇게 하나의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똑같이 생긴 문이 또 하나 눈 앞에 있습니다.
잠시 후 '보호사'라고 불리우는 단단한 체격을 가진 아저씨가 고개를 내밉니다.
나는 000를 면회하러 왔노라고 말합니다.
-관계가 어떻게 돼죠?
-사촌 언니에요.
-사촌이라면?
-이모 딸이오.
나는 미리 짜여진 대본대로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대답을 합니다. 이즈음에서 그냥 들여보내주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 보호사는 잠시만 기다리는 말을 남기고는 문을 닫고 들어갑니다.
잠시후 간호사가 나옵니다.
-오늘 선생님과 면담하기로 하셨죠?
-네. 그 전에 환자를 보고 싶은데요
간호사가 문에서 비켜 섭니다. 그리고 제 가방을 받아듭니다. '전화기도 넣으세요'하는 말과 함께.
725호
친구 집 아파트 호수는 1725호 입니다.
나는 참 공교롭구나! 하고, 이 병실문을 열때마다 생각합니다.
이 병실 문앞에 설때까지 나는 친구집 아파트 호수를 기억한 적이 없습니다.
늘 공간적인 느낌으로 이 위치에 있는 집... 하면서 찾아갔었는데 병실 문 위에 작게 써 있는 725라는 숫자를 보면서야 나는 그녀 집 아파트 호수를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마치 거울 옆 포스트잇에 오늘 시험볼 영어 단어를 암기하듯이
병실의 문을 열 때마다 호수를 확인하고, 칠백이십오, 신기하다! 하고 읊조립니다.
작은 창문에는 굵은 쇠창살이 쳐져 있고, 그 창살 너머에는 다시 가림막 같은 것이 있어서 밖은 보일듯 말듯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무섭지는 않지만 기분은 올때마다 좋지가 않습니다.
병실 문을 열어주며 보호사 아저씨가 면회는 한시간만이라고 주의를 줍니다.
나는 순간 괜히 기분이 나빠집니다.
-어차피 저 한시간 후에 담당의사와 면담 있어요.
이 아저씨는 처음보는 얼굴인데 아까 문을 열어줄 때부터 유난히 까탈스럽게 대합니다.
그렇게 친구를 만나고
다시 친구의 주치의를 만나고
10년전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와 친구가 만날때면 언제나 옆에 앉아 있다가
자리가 끝날즈음이면 아이스크림을 배달해 오던 또 다른 친구를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어지지 않지만, 이렇게까지 될 수밖에 없었을 이유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에 나는 깊고 긴 한숨을 토해냅니다.
-한숨 쉬지마. 차라리 잘된 걸 수도 있어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야
나는 알았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경황이 없는 와중에
아직은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어색하기만 한 선생님을 찾아갔는지.
왜 꼭 선생님을 만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는지.
요즘 제가 가장 궁금한 건
-사랑이 뭔가? 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랑해'라고 말할 때는 어떤 때인가?
'사랑'이라는게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놈의 사랑이란 것 때문에
누군가는 손목을 긋고, 누군가는 기억을 잃고, 누군가는 보낼 수 없다며 울고, 누군가는 보내주겠다며 힘들어하고, 누군가는 가고싶지 않다고 버둥대고 있으니 정말이지 미칠 노릇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제가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조카를 떠올려봤습니다. 내가 그 녀석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어떤때인가?
그냥 아무때나,
TV드라마를 신나게 보다가도 갑자기 방에서 컴퓨터하고 있는 녀석을 크게 부르며 '사랑해~'하고 말하고,
나한테 심통을 부릴때에도,
너무 귀여워서 볼을 깨물어 주고 싶을 때에도,
이모야~ 하면서 재잘댈때에도...
하지만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늦은 밤 모두 불을 끄고 잠들었는데 혼자만 잠이 오지 않아서 제 옆에 그 녀석이 앉아 엉엉 울어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채 그냥 잠을 잡니다.. 사랑한다며... 역시 엄마가 아니라서 그런건가! 하며 지나쳤던 일을 떠 올려보니 역시나, 사랑한다는 건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단지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쯤 상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다거나, 아니면 그런 말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어떤 상황이나 필요에 의해서만 쓰이는 말이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셨죠.
'사랑하는 것 같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이게 사랑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라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아주 고요한 밤이었습니다.
여름밤이었지만 덥지 않았고, 그저 고요함과 어둠이 차분이 내려앉아 있던.
지나가는 차도 가로등 불빛도 없었는데
그 어둠이 참 밝게 느껴져서 나는 선생님을 똑바로 보고 있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그 밤 선생님의 표정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그 고요한 어둠은 차분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면서 우리가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도록 해 주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지금 이 분위기와 사랑한다는 말은 참 잘 어울려.
그런데 선생님은 아주 느릿하고도 나직하게, 끊어질 듯 말듯한 속도로 다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것 같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이게 아마.. 사랑하는게 맞는 것 같아...' 라고.
그래서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선생님을 찾아간 거 였습니다..
왠지 선생님은 답을 알것 같았나 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랑일거라고 느꼈던 그 감정은 어떤 거였나요?
하지만,
이제서야 무엇을 물어봐야하는지 알게됐지만,
나는 차마 선생님께 그것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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