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약간의 거리 2004. 3. 19. 10:31
 

'행복을 사면 행복해 질까?' 하는 신문기사를 보다가 문득 예전의 일이 생각났다.

2000년 들어 유난히 행복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책, 광고,  방송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이야기인데...


내가 처음 방송을 했을 때 맡은 프로그램의 제목에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었다.


남녀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아침프로그램의 리포터로 방송을 시작했는데...

담당 제작부장님도, 담당 피디도 모두 내가 남자진행자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을까 심각하게 걱정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뭐가 문제지? 나이도 많으신 분이고... 그냥 어른대접 해 드리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간 방송을 통해 보여준 그분의 이미지는 고지식하면서도 털털하고, 걸걸하고, 뒤 끝없고...


처음 방송을 하는 날, 리포터들을 수도 없이 그만두게 만들었다는 남자진행자의 곤란함이 뭔지 알수 있었다.

어리버리한 방송 새내기의 긴장을 원숙한 진행자의 입장에서 도와주기는커녕, 어떻게든 곤궁으로 치닫게 만들려는 집요한 질문과 방송 수위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멘트, 이것도 재미가 없는 날은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를 할때까지 잠자기 일쑤였다.


사실 방송을 처음 할 때는 당장 써간 원고 글씨도 제대로 눈에 안 들어오는데 ‘저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멍하고 긴장이 되어서 제대로 응대를 할 수가 없어서 잠을 자는 날이면 안심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력이 붙고 나니, 황당한 질문이 쏟아지지 않는 방송은 재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된거다.



그날은 성형이 유행하는 세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성형으로 예뻐진 사람보다는 성격 좋은 사람이 낫다’(그때까지는 정말 세상의 반응이 그랬다) 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 정말로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 그런데... 이 봐요~~ 얼굴은 정말 못봐주겠어. 볼 생각만해도 괴로워. 몸매는 항아리야.  거기에다가 성격까지 나뻐!! 이런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야 돼?


‘나를 빗대어 놀리는 말이구나!’

이 생각말고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는 거였다.

그리고 늘 내편이 되어 도와주던 여자진행자까지 ‘얘가 뭐라고 하나 들어봐야지?’ 하는 눈으로 말똥말똥 쳐다보는데...

2초, 아니 3초... 정도 정막이 흘렀을까?

라디오에서 이 정도 멘트가 없다면 방송 사고다. 어쩌지?

아무말이나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밀려오면서 내 입에서 나간 말


- 지금... 저한테 상담하시는 거죠?

이건 정말 시간을 끌어보려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여자진행자 박수를 치며 스튜디오가 떠나가라 웃어대고, 엔지니어, 피디 할 것 없이 즐거워 난리가 난거다.

그리고 저 곤란하고 황당한, 쓴 입맛을 다시는 남자진행자의 표정은 또 뭔가?!


나는 말을 해 놓고도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위기가 무사히 넘어갔다는 안도감. 휴~~~~~~

-그건 방송 끝난 뒤에 따로 상담해 드릴께요...

무사히 방송이 끝나고 그날 이후 남자진행자는 다시는 나한테 곤란한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대신에 잠자는 그를 깨우느라 연신 질문을 한 사람은 나였다. ^^


한번은 지방방송국을 순회하며 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강원도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가는 길에 작가와 여자진행자가 탄 차가 사고가 나게 된거였다. 당시에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상황도 아니었고...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 와중에 작가에 대해 아주 섭섭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회사 사정상 다른 프로그램의 피디가 우리 프로그램까지 제작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방송하러 올라갔을 때

스튜디오 밖에는 피디, 작가, 여자진행자가 앉아 있었다.

각자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힘들고 섭섭한 이야기들을 하고 급기야 작가와 여자진행자가 울어버리는 거다.


-안나씨, 이리로 와바. 안나씨도 힘들어? 말해 봐.

-저요...  (어리버리 무슨 일인가 눈치를 보고 있는데...)

-솔직하게 오늘 다 말해. 남자진행자가 맨날 놀려서 힘들지?

-아니... 저 뭐... 별루....


늘 듣는 인신공격 발언이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그걸 맘에 담아두고 살지 않은지라... 아니 오히려 뭐라고 대응할까? 하며 조금을 즐기던 차라서 불만이라고까지 말할 건 없는데 왠지 아니라고 말하면 공공의 적이 될 것 같은 분위기...


-아~~~ 이 프로그램 제목을 바꿔야 하는 거 아냐? 진행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잖아.


정말 그랬다.

깐깐한 피디,

오늘은 어떤 방송사고를 칠까? 늘 긴장하며 지켜봐야 하는 남자진행자.

두 남자가 작가, 여자진행자, 그리고 리포터까지.. 세 여자를 들들 볶는 프로그램이었던 거다.

 

어쨌든 그날 그렇게 한바탕씩 울고들 난 뒤 사람들은 평정을 되찾았다.

속앳말을 꺼내놓고 울면서 조금은 행복해 졌다고 해야 하나?

 

얼마지나지 않아 회사가 평정을 되찾고 나는 그 프로그램을 그만뒀고,

지금은 진행자도 모두 바뀌었지만 아직도 행복.... 하는 그 프로그램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 그 프로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을 찾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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