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승호의 스트레스

약간의 거리 2005. 4. 13. 10:06

 


 

 

"승호는 아빠의 장난감이야."

 

이 말은 승호가 아주 어렸을 때.... 물론 승호는 이제 겨우 14개월이다....

그러니까... 승호가 겨우 기어다니며 그나마 스스로 몸을 어느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동생과 내가 했던 말이다. 깊은 생각 없이...

 

몸이 불편해서 방안에 누워만 계시는 아빠에게는 TV가 유일한 벗이었다. 식사를 하실 때나 상처 치료를 위해서 등등, 소통이 되는 엄마를 제외하고 우리 딸들은

아침 저녁 들고 나면서 인사를 할 때라든가, 뭔가 심부름을 해 드린다던가, 할때를 제외하고는 그 방에 들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지지난해 아빠가 많이 편찮으시자 동생은 돌아가시기 전에 손주라도 보게 해 드려야 한다면서 부랴부랴 직장을 그만두고... 그리고 얻은 결실이 "승호"이다.

아빠에게 승호를 매일 보여드리기 위해서 동생은 자기 집을 전세 놓고는 우리집 지하로 들어와 셋방살이를 시작했고, 눈 뜨면 올라오고 잘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가고 있다.

 

승호의 일과도 같다.

눈 뜨면 올라와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서 문안인사를 하고 그곳에서 놀만큼 놀다가 나오고, 낮에도 엄마랑 할아버지랑 셋이 있으니 수시로 함께 지낸다.

 

아직도 제대로 된 "말"이라는 건 할 지 모르기는 하지만, 그나마 입을 떼게 되었을 때는

"똘똘아~" 하고 부르는 할아버지 소리에 곧잘 "웅!" 하고 대답하고 달려 가곤 했다.

개인업무(?)가 바쁠때는 가지는 않아도 대답을 넙죽넙죽해서 우리를 웃게 만들어 주곤했는데...

 

그러던 녀석이 이제는 할아버지가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한테 가라고 하면 도리질을 쳐가며 짜증을 내는 것이다. 한 동안은 싫어했다가도 과자를 준다고 하면 넙죽 가서 받아 먹고 오곤 했는데... 이제는 과자마저도 거절을 한다.

 

 

어제 저녁 역시, 퇴근한 나에게 달려들어서 안겨서 떨어지지 않는 녀석에게

"이모랑 할아버지 방에 가서 놀까?" 했더니 몸이 휘청거릴만큼 강하게 도리질을 하며 짜증을 내는 거다. 아빠는 연신 승호를 불러대는데, 녀석은 싫다고만 하고.

 

어쩌면 아빠는 그 녀석을 들여보내 주지 않는 우리까지 원망스러워질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아이에게 자꾸만 싫은 걸 강요하며 스트레스를 줄 수도 없는 일이고.... 고민을 하다가

 

"승호야, 우리 피아노 치러 갈까?"

(승호의 장난감 피아노는 할아버지 방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피아노를 치러 갔다. 나는 승호 뒷편에 앉아서 녀석이 싫증을 낼 만하면 피아노를 같이 치는 시늉을 하며 놀아줬다. 오랜만에 방에 들어온 승호가 반가운 할아버지는 승호가 좋아하는 콩을 준다며 녀석을 유인하고 있다.

 

"승호야, 콩 줄께. 똘똘아~ 할아버지가 콩 줄께..."

 

이제는 애원에 가까운 아빠의 말소리를 승호는 외면하고 있다. 승호의 시선은 오로지 피아노와 이모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만 머문다. 피아노치기도 재미가 없어졌는지 승호는 다시 밖으로 나간다.

 

할아버지도 이제 지치셨을까?

30분 남짓의 시간이 흐를동안 승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침묵이 길어지자 녀석도 궁금해졌는지, 한참을 놀다가 제발로 할아버지 방에 간다. 그러나 그뿐.

방문을 활짝 열여 제끼고는 할아버지 얼굴을 확인한 녀석은 냉큼 밖으로 나온다.

 

 

 

아빠에게 승호는 소통이다.

낮이면 사람이 없어 고요한 집안에서 아빠를 찾아와서 한참씩을 놀아주고, 웃어주고, 장난을 치다 나가는 유일한, 숨을 쉬고 있는 생물체이며,

저녁이면 TV소리, 대화소리, 함께 밥 먹으며 웃는 소리에서 소외되어 있는 아빠를 찾아와 유일하게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승호에게 할아버지의 방은 단절이다.

같이 박수 쳐 주고, 노래 불러주고, 안아주고, 장난감을 갖고 놀아주는 엄마, 할머니, 이모가 없는 공간.

비좁은 침대위에서 할아버지가 주는 과자를 받아 먹거나, 리모컨을 조물락거리거나, TV를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갑갑한 공간인 것이다.

 

 

승호는 요즘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다.

그리고 아빠는

피하는 승호 때문에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소외감을 느끼는 중이다.

 

 

승호는 장난감이 아니었다.

승호는 아빠에게는 웃음을 주고, 생기를 주는 천사였다.

 

승호와 아빠 사이의 평화가 빨리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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