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2046: 엇갈린 사랑

약간의 거리 2004. 10. 27. 15:35
  

옛날 사람들은 비밀이 있으면

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대고 말을 하고

구멍을 흙으로 메꾼다고 했다.


영화는 이렇게 화양연화의 마지막 나래이션과 오버랩 되면서 시작한다.

그때 차우는 어떤 유적같은 곳의 기둥에 그의 비밀을 말했었다.

그가 말한 비밀은 아마도 (Quizas) 리첸과의 것이 아닐까?...

그러나 비밀은 나무 구멍 속에 남아 있는 게 아니다.

그토록 간절히 쏟아내고 싶지만 결국에는 흙으로라도 막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의

가슴속에 머무르는 것이다.


추억은 항상 눈물을 부른다.

 

2046에 가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곳을 가고자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정말 잃어버린 기억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잃은 건 기억이 아니라 사랑이었고,

2046에 가는 이유는 잃어버린 사랑의 기억을 놓기 싫어서다.



그날 우리는 신촌에서 <화양연화>를 봤다.

처음으로 커플석에 앉았다.

처음으로 보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였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좁은 계단을 엇갈려 지나가는 차우와 리첸의 모습

서로의 등을 스치며 지나가는 두 사람의 반복되는 모습이 그들의 엇갈린 사랑을 암시한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4년 후 나는 대학로에서 <2046>을 봤다.

의자는 모두 커플석이 될 수도, 커플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2046에 가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곳을 가고자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다.

한 명도 다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 밖에는.....  

 

2046에 가면 정말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수 있을까?

만약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았다면, 그 사랑은 예전의 그것과 같은 것일까?

지금,

극장에서 2046을 보면서

4년 전 그때,

화양연화를 떠올리는 나처럼


영화는 2046... 미래에 관한 이야기 같지만

리첸을 잊지 못하는 차우라는 남자의 과거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과거 속에서 헤매고 있어도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러 2046으로 떠나고 싶어 해도

시간은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다.

어쩌면 또 다시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

4년 전의 어떤 기억을 찾아 또다시 2046으로 떠나고 싶어 하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갑자기 예고편으로 보았던 이프온리~ 의 내용이 궁금해진다.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아서 하루를 되돌리고 싶어 했고, 그래서 하루 전으로 되돌아간 주인공들은 어떻게 됐을까?


예전에 그런 영화가 있었다.

슬라이딩 도어즈...

그 영화에서 지하철을 탔던 주인공도, 타지 않았던 주인공도 결과적으로 행복하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너무 많은 생각이 교차해서 다 말 할 수가 없다.

고스트를 찾아 헤매던 이노센스와

'그날밤 나는 내 모든 로맨티시즘을 쏟아 부어서, 지금 나에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던 비포 선셋.

영화 내내 나의 귀를 사로잡던 음악.

그리고 2046이라는 숫자에 담겨 있는 역사적인 배경과 의미들...........



그렇지만 내가 결국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것뿐이다.


나도 영화 속 소설의 주인공과 함께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


 

2046

나는 이 세 장면이면 영화에서 그려진 사랑의 엇갈림이 모두 보여진다고 생각한다.

<엇갈린 사랑 - 사랑은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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