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여자, 히로코의 이야기
나는 새하얀 설원 위를 휘적휘적 걸어간다.
맞은 편에, 이츠키가 죽어간 산이 버티고 서 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인 장벽처럼,
저 장벽 너머 어딘가에 이츠키가 살아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른다.
내 목소리가 이승 저편까지 뛰어넘을 수 있도록.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그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이 세상 끝에서.
묻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 그 수많은 이야기를 다 가슴에 묻고,
간절하게 단 한마디의 인사만을 전하게 된다.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당신이 죽은 뒤, 당신을 소유할 수 없어도,
그저 같은 하늘 아래 당신이 살아있어만 준다면 하고 바랬었다.
하지만 당신은 죽었다.
죽음은 어떤 후회도, 바람도 모두 거두어가버리는 절대적인 고독이었다.
당신은 저승에, 나는 이승에,
그러나 희망은 있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내 안에 살아있으니까.
추억이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니.
당신과 나는 진짜 사랑을 했던 것이다.
희미하게 들리는 메아리 속에서,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었다.
당신 역시 내게 말했다.
히로코, 잘 지내나요?
난 잘 지내요.
그래, 나를 사랑했던 당신은 내가 잘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을 놓는다.
지난 추억의 시간을 향해,
당신이 사라져 슬픈 이 순간을 향해,
언젠가 다시 만날 영원을 향해,
나는 영혼을 다해 마지막 안부를 묻는다.
내 사랑, 이츠키에게 보내는 짧은 러브레터다.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 그 여자, 이츠키의 이야기
히로코양, 잘 지내나요?
난 잘 지내요.
감기는 다 나았습니다.
얼마 전, 눈이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
할아버지가 나를 업고 병원에 달려갔다 합니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사랑이 나를 살렸습니다.
그날 폭설 속에서 우리를 인도해 준 것은 아마도 아빠의 영혼이었을 거에요.
내가 보낸 편지를 다시 보내시다니,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도서 카드에 쓴 이름이 정말 그의 이름일까요?
혹시 그건 이츠키양, 당신의 이름이 아닐까요? 라던
그 질문에 대해서도 말이죠.
그리고 나는 오늘에서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들이 찾아왔어요.
얼마 전에 만난, 중학교 도서부 후배들이었죠.
아이들은 내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내밀었는데,
그 책은 언젠가 이츠키가 전학가기 직전,
우리 집에 불쑥 찾아와 학교에 반납하라고
내게 남겨주고간 바로 그 책이었어요.
후배들이 시키는대로, 카드 뒷면을 보았는데...
어떤 여자애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 그것은 바로 내 모습이었습니다.
빛바랜 종이 속에서 나는 하얗게 미소짓고 있었어요.
히로코양이 말한 그 '추억의 빛' 속에서 말이죠.
오래전 수줍게 고백하지 못한 그 애의 마음 하나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슬프고도 아름다운 빛을 선사해 주었네요.
...
히로코양,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cbs <신지혜의 영화음악>에서...
추억이라는 건 힘이 있다.
살아가는데 힘이 되고,
용서할 수 있게 되고,
미움을 걷어가기도 한다.
'┗좋아하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속 (0) | 2004.03.11 |
---|---|
아들에게 전하는 秘傳 縮地法 (0) | 2004.03.10 |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 <러브레터 3> (0) | 2004.03.06 |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 <러브레터 2> (0) | 2004.03.04 |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 <러브레터 1> (0) | 2004.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