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글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 <러브레터 4>

약간의 거리 2004. 3. 8. 10:00

 

* 그 여자, 히로코의 이야기

 

나는 새하얀 설원 위를 휘적휘적 걸어간다.

맞은 편에, 이츠키가 죽어간 산이 버티고 서 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인 장벽처럼,

저 장벽 너머 어딘가에 이츠키가 살아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른다.

내 목소리가 이승 저편까지 뛰어넘을 수 있도록.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그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이 세상 끝에서.

묻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 그 수많은 이야기를 다 가슴에 묻고,

간절하게 단 한마디의 인사만을 전하게 된다.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당신이 죽은 뒤, 당신을 소유할 수 없어도,

그저 같은 하늘 아래 당신이 살아있어만 준다면 하고 바랬었다.

하지만 당신은 죽었다.

죽음은 어떤 후회도, 바람도 모두 거두어가버리는 절대적인 고독이었다.

당신은 저승에, 나는 이승에,

그러나 희망은 있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내 안에 살아있으니까.

 

추억이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니.

당신과 나는 진짜 사랑을 했던 것이다.

희미하게 들리는 메아리 속에서,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었다.

당신 역시 내게 말했다.

 

히로코, 잘 지내나요?

난 잘 지내요.

 

그래, 나를 사랑했던 당신은 내가 잘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을 놓는다.

지난 추억의 시간을 향해,

당신이 사라져 슬픈 이 순간을 향해,

언젠가 다시 만날 영원을 향해,

나는 영혼을 다해 마지막 안부를 묻는다.

내 사랑, 이츠키에게 보내는 짧은 러브레터다.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 그 여자, 이츠키의 이야기

 

히로코양, 잘 지내나요?

난 잘 지내요.

 

감기는 다 나았습니다.

얼마 전, 눈이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

할아버지가 나를 업고 병원에 달려갔다 합니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사랑이 나를 살렸습니다.

그날 폭설 속에서 우리를 인도해 준 것은 아마도 아빠의 영혼이었을 거에요.

 

내가 보낸 편지를 다시 보내시다니,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도서 카드에 쓴 이름이 정말 그의 이름일까요?

혹시 그건 이츠키양, 당신의 이름이 아닐까요? 라던

그 질문에 대해서도 말이죠.

 

그리고 나는 오늘에서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들이 찾아왔어요.

얼마 전에 만난, 중학교 도서부 후배들이었죠.

아이들은 내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내밀었는데,

그 책은 언젠가 이츠키가 전학가기 직전,

우리 집에 불쑥 찾아와 학교에 반납하라고

내게 남겨주고간 바로 그 책이었어요.

 

후배들이 시키는대로, 카드 뒷면을 보았는데...

어떤 여자애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러브레터 스틸

... 그것은 바로 내 모습이었습니다.

 

빛바랜 종이 속에서 나는 하얗게 미소짓고 있었어요.

히로코양이 말한 그 '추억의 빛' 속에서 말이죠.

오래전 수줍게 고백하지 못한 그 애의 마음 하나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슬프고도 아름다운 빛을 선사해 주었네요.

 

...

히로코양,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cbs <신지혜의 영화음악>에서...

 

 

 

추억이라는 건 힘이 있다.

살아가는데 힘이 되고,

용서할 수 있게 되고,

미움을 걷어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