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츠키와 히로코의 러브레터
(1)
...
히로코양, 이츠키와의 기억이란 거의 이름에 얽힌 것이었죠.
후지이 이츠키.
입학실 날, 담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
우리는 동시에 네, 하고 대답을 했어요.
아이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이후로 그애와 나는 줄곧 놀림감이 되었답니다.
...
이츠키양, 하지만 그는 이름이 같은 여자에게 운명적인 뭔가를 느끼지 않았을까요?
...
히로코양,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당신에겐 로맨틱하게 들릴지 몰라도 현실은 살벌했답니다.
함께 주번을 섰을 때, 아이들은 커플이 탄생했다며 놀려댔고,
반장 선거 때는 투표용지에 나와 그애의 이름을 나란히 적고
그 안에 하트를 그려넣기도 했죠.
화가 난 그애는 회의를 진행하던 친구에게 한방 날렸어요!
하지만 결국 우리는 나란히 도서부장을 떠맡게 되었는데
그애는 빈둥거리기만 할 뿐 도서실 일은 거이 안 했다고 보면 됩니다.
아아, 그래요...
어느 봄날, 창가에서 책을 읽던 이츠키의 모습이 떠올라요.
빛 속에서 그애는 책을 읽고 있었죠.
4월... 이었어요.
창가로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일렁이는 새하얀 커튼 속에서,
그애의 모습은 드러났다 사라지고, 드러났다 사라지고...
그애는 결국 이렇게 시간속으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네요.
그런데 히로코양,
이상해요.
커튼이 잦아들며 나타나던 그애의 모습이
지금 왜 이렇게 환하게 빛나고 있는 걸까요.
그런데 그 빛이 환하지만 부서질 듯 아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이츠키양,
추억이 환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것이 시간의 어둠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죠.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빛을 남긴답니다.
이츠키는 지금, 추억의 빛 속에 싸여 있는 거에요.
(2)
...
히로코양, 그애는 책을 많이 빌려갔어요.
그것도 어려운 시집이나 고전문학 전집처럼 아무도 안 읽는 책들을요,
그런데 빌리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죠.
그애는 책 뒤편에 꽂힌 대출카드에 후지이 이츠키라고,
자기 이름을 써 넣는 게 재밌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특이한 애 였어요.
...
이츠키양, 당신의 추억 속에서 난 내가 몰랐던 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곤 해요.
나는 이츠키의 일부만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좀 더 이야기 해 주세요. 당신의 추억을 나누어 주세요.
...
음, 그래요. 또 하나, 기억나는 게 있네요.
언젠가, 그애와 나의 영어 시험지가 뒤바뀐 일이 있었어요.
그애의 점수는
세상에나,
27점이었죠.
야, 이츠키, 시험지 바뀌었어!
그 한마디를 못해 밤 늦게까지 학교 자전거 주차장에서 그애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자전거 패달을 돌려대고,
그렇게 드러난 빛 아래서 그애는 시험지 확인을 했어요.
그때, 빛 속에 드러난 이츠키의 옆모습도 환하게 기억나요.
히로코양, 그 한자락의 빛 역시도...
시간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추억의 빛이겠지요...?
아, 그리고 사나에라고, 언제나 머리칼이 엉켜있던 여자애가 이츠키를 쫓아다녔답니다.
어느 날인가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가는데,
뒤에서 불쑥 나타난 이츠키가 내 머리에 종이 봉투를 뒤집어 씌우고 달아났던 적오 있었어요.
그때 정말 크게 다칠 뻔했는데,
어쩜 미안하다는 말도 한마디 안하는 거 있죠?
이츠키는 무뚝뚝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였는데,
히로코양, 당신은 그애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나요.
*****************************cbs <신지혜의 영화음악>에서.......
그애는 술을 마시면 많은 이야기를 했죠.
그래서 저는 그 애랑 술 마시는 걸 좋아했답니다.
평소엔 무뚝뚝하고 예, 아니오 조차 고개짓으로 대신하는 아이였는데...
언젠가는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지나가는 여자애 둘 한테 다가가 술값은 자기가 낼테니 같이 술을 마시자고 했대요.
그리고는 저에 대한 이야기를 마구 해댔었답니다.
왜?
모르니까.
걔네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다시 만날 사람들도 아니니까.
영화 <러브레터>에 대한 글을 읽다보면 자꾸만 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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