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전하는 秘傳 縮地法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편지글로 써 달라는 주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빠의 고향은 너도 잘 알다시피 충청도 산골이다.
'충청도'하면 말도 느리고 행동도 굼뜨다고 흔히 말하지.
하지만 충청도 사람이라고 해서 급한 일없고 빨리 가고 싶은 마음 없겠느냐.
우리 고향에는 사람의 그런 조급함을 속으로 갈무리하고 천천히 안전하게 움직이되 결국에는 빨리 갈 수 있도록 한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단다.
아빠는 오늘 너에게 충청도식 축지법을 이야기 해 주고 싶다.
충청도식 축지법의 첫째 요결은 멈춰 서서 잘 살피는 것이다.
가야 할 길인지 가서는 안될 기린지 살피기도 전에 길을 잡아나가선 안된다.
사람이 일생을 한 눈 팔지 않고 한 길에 전념했다고 치자.
그러나 그 뜻이 바르지 않고 빗나간 것이라면 진실 된 길은 아니다.
진실이 아니라면 처음에 빗나갈 때는 사소한 차이였겠으나 나중에 이르러서는 아주 크게 빗나감이 되고 마는 것이란다.
대학과 전공의 선택, 진로의 결정, 사랑과 결혼...... 그런 일은 무수히 많다.
얘야, 정말 주의하여야 할 것은 그런 섣부른 선택이 이념이나 신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때이다. 예를 들어볼까,
이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는 생명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고귀한 일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또 생명보다 가치있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도 말한다.
앞에 적은 명제는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킬 때 구실로 삼는 것이란다.
뒤에 것? 그건 전쟁을 그만두고 싶을 때 핑계로 대는 것이지.
미묵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자기 나라 젊은이들의 목숨과 열정이, 약한 나라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데 쓰여도 그걸 인식하지 못한채 앞으로 앞으로만 밀고 나간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
가도 소용없고 무의미한 길을 가지 않는 것 그것이 첫째가는 원칙이다.
둘째 요결은 자갈밭을 딛지 말고 진창을 건너뛰지 말라는 것이다.
자갈밭은 둥근 돌들이 깔려 있는 곳이다.
발을 내딛는 순간 돌이 구르며 미끄러지기 쉽고 울퉁불퉁해 발을 상하기도 쉽다. 단단하다고 해서 어느 곳에든 좋게 쓰이는 건 아니다.
그런 자갈밭이 앞에 놓이거든 흙이 다져진 길을 찾아 돌아가거라.
이 요결은 사회에서 네가 몸 담을 곳을 찾는데도 적용될 거다.
모인 사람들이 서로 자기를 앞세우고 제각각 구르는 곳은 머물지 말아라.
그곳의 구성원들이 진흙처럼 자기를 작게 해 잘 뭉치고 다져진 그런 곳을 찾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다.
진창을 건너 뛰는 것은 사려깊지 못할 뿐 아니라 자만심에 빠졌다는 증거이다. 어디까지가 진창인지 진창 너머엔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몸을 띄워 날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흔히 남자가 소심하고 째째해서야 쓰겠냐며 풀쩍 몸을 날리면서 용감하다고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용감하다는 건 앞에 일어날 일에 대한 통찰력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무식하고 자신감만 넘칠 때 벌어지는 일이지.
너도 요즘 보지 않든, 크게 논다고 벤쳐 사업 지원금 퍽퍽 뿌리고 넙죽넙죽 집어 삼켰다가 가족과 친인척, 친구들까지 망하게 하는 사람들 말이다. 주식 투자로 크게 한 건 잡는다고 했다가 망한 소시민들도 주위에는 많단다.
가지 않을 길이라면 마르길 기다리든지 디딜 곳을 마련하든지 돌아가든지 해야지 용감한 척은 금물임을 명심해라.
마지막 요결은 산이 나오면 하루 묵었다가 넘고, 강이 나오면 건너 가 묵으라는 것이다.
빨리 갈 욕심에 험한 길을 무리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어찌 험한지 모를 거다. 남보다 먼저 가려고 어두운 산길을 혼자 넘으려 해서는 안된다. 푹 자고 다음 날 함께 올라라.
더디 가도 그렇게 함께 하는 것이 길을 가는 사람들의 도리인 거다.
강을 만났을 때는 그 반대다.
하루 묵으며 놀다 가자고 누가 어찌 붙잡더라도 뿌리치고 강을 건너라.
밤사이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 날 수도 있는 데 어찌 흥청이며 밤을 보낸단 말이냐. 하루 게으름이 며칠간 발을 묶을 수도 있는 일이다.
욕심은 버리고 유혹은 떨쳐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걸 구분하지 못한다.
이렇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 하루, 하루를 가다보면 누구보다 앞서 갈 수 있다는 것이 충청도식 축지법이다.
흔히 秘傳되어 내려오는 축지법이라 하면 신기한 술법과 묘수들이 가득하리라 생각할 지 모르나 진정한 道는 어렵지 않은 것이다.
다만 道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루는 것이기에 그 기본 원칙들을 지켜나가지 않으면 이해하긴 쉬워도 성취는 어렵단다.
걸음은 그렇게 보폭이 작고 단단해야 한다.
겉보기엔 답답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엔 그 이상의 축지법도 그 이하의 축지법도 없단다.
왜냐하면 그건 인간의 분수를 아는 걸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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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이 글이 그리운 건.....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그러하기 때문이고,
못 만난지 오래된 아저씨가 그립기 때문이다.